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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5) 중공군을 겨눈 포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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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군 포병대의 155㎜ 야포가 1951년 서울 북방을 공략하려던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국군은 6·25전쟁이 터진 뒤 1년6개월 정도가 지난 52년 초반쯤에야 미군의 지원을 받아 현대적인 포병 화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의 2군단은 52년 5월 새로 육성한 국군 포병을 이끌고 중공군과의 일전에 나섰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새로 만든 국군 2군단이 강원도 화천 소토고미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언뜻 나의 뇌리를 스치고 갔던 중공군의 그림자가 이제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치는 것이 효율적일까. 우리에게는 이제 미군의 지원으로 생긴 포병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먼저, 한 방을 건네주는 게 필요할까, 아니면 기다렸다가 거센 반격을 펼쳐 보임으로써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국군의 강한 실력을 선보일까.

 이 땅 위에서 중공군과 직접 싸움을 벌였던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힘에 겨웠던 상대였다. 앞에서도 이는 여러 차례 언급한 대목이다. 그들은 1950년 북진을 거듭하면서 당시 압록강 방향으로 진출하려던 국군과 유엔군의 눈앞에 유령처럼 나타났던 군대였다.

 그해 12월 국군과 유엔군은 크리스마스 대공세로 전선을 한꺼번에 밀어 올려 압록강과 두만강을 차지함으로써 가슴 벅찬 한민족의 대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안개처럼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적유령 산맥 곳곳에 포진해 들어왔다. 그들은 이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뼈아픈 기습을 가해왔고,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펼쳐진 거센 중공군의 공격은 특히 국군만을 겨냥해 날아들었다. 10년 넘게 쌓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 경험에다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축적했던 것까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화력과 보급 면에서는 국군에 비해 나을 게 없었지만, 압도적인 병력에다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저들은 국군에게는 벅찬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특히 1·4 후퇴 뒤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은 유독 국군을 싸움 상대로 골랐다. 허약한 전투력에다 화력도 고만고만했던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51년 시작한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중공군은 50년 압록강으로 서둘러 진격한 국군 2군단을 와해시켰고, 51년 춘계(春季) 막바지 대공세에서는 국군 3군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국군만을 노려 치고 들어오는 중공군. 이들을 이번에마저 막지 못하면 신생 국군 2군단은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민, 나아가 한국군 현대화 작업을 위해 강력한 화력을 지원한 미군에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대응해야 했다. 감정적인 차원에서라면 저들과 한 차례 화끈하게 붙어서 예봉을 꺾고, 나아가 앞으로의 전선에서 국군을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치명적인 일격(一擊)을 가하는 게 옳다. 그러나 2군단은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군대였다. 아울러 중공군 포로를 잡아와서 적정(敵情)을 파악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저들의 병력과 화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는지를 상세히 알 수는 없었다.

 명분을 위해 싸움을 펼쳐서는 안 된다. 실재(實在)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하고, 그에 맞춰 병력과 화력을 운용하는 게 좋은 싸움이다. 아직은 적의 실력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2군단이 아직 전면적으로 적과 붙어서 얻을 것은 별로 없다. 당시의 싸움은 고지를 쟁탈하는 측면에 머물러 있었다. 서로 전면전으로 붙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중공군은 2군단 전면에 많이 모여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공군 포로들로부터 얻은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강력한 화공(火攻)을 선보임으로써 기를 꺾는 게 순서였다. 군단 예하에는 미 포병을 중심으로 구성한 5포병단이 있었다. 게다가 광주에서 훈련을 받은 뒤 군단에 배속돼 실전 훈련을 쌓아야 하는 국군 155㎜ 포병대대들도 와 있었다.

 나는 그러한 내 생각을 담아 미 8군 사령부에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다. 51년 5월 중순이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내 생각과 같았다.

 “백 장군, 중공군이 군단 정면에 모여들고 있다면 이제부터 강력한 포격을 가해라. 사전에 적을 제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포탄은 아끼지 말라. 군단이 필요한 만큼 아낌없이 적에게 퍼부어라!”

 밴플리트 장군은 51년 중공군이 막바지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면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춘계 대공세 때 한국에 부임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는 아군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절박했던 것으로서, 국군 3군단의 와해에 이어 중동부 전선이 저들에게 뚫릴 경우 미 8군 사령관으로 새로이 부임했던 밴플리트 장군의 입장이 크게 궁지에 몰릴 판이었다.

 아울러 밴플리트는 중공군이 국군만을 골라 공격을 펼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늘 국군만을 싸움 상대로 골라 덤벼드는 중공군의 전략적 의도를 꺾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 따라서 그는 52년 4월에 다시 만든 국군 2군단을 노리면서 모여든 중공군에게 강한 화력을 선보여야 앞으로의 싸움에서 국군이 심리적으로 중공군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밴플리트 사령관과 통화를 마친 다음 군단 포병단장인 메이요 대령을 불렀다. 나는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메이요 대령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포트 실의 미 포병학교 교관을 오래 역임한 장교였다. 미 포병은 교범에 따라 목표를 관측한 뒤에 사격을 하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포병학교 교관을 오래 지낸 그의 생각에는 나의 사격 지시가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밴플리트 사령관과 내가 구상한 것은 일종의 ‘기점(基点) 사격’이었다. 어느 한 지점을 상정하고 포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메이요 대령은 목표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기점 사격은 무모하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더구나 미 8군은 포탄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메이요는 기점 사격으로 포탄을 낭비하면 곤란하다는 입장을 내게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의 명령이니 포격을 하라”고 거듭 지시했다. 그는 내 입에서 ‘밴플리트 사령관의 명령’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예스, 서(Yes, sir)”라면서 다시는 토를 달지 않았다.

 군단의 포병단은 소토고미의 군단 사령부 인근에 있던 금성천 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포병단이 보유한 120문가량의 155㎜와 105㎜ 야포, 2군단 예하 3개 사단에 있는 3개 포병대대의 포신이 일제히 전선 너머의 사격 기점을 향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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