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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코스와의 싸움, 상대와 싸우는 순간 무너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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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호 14면

한국남자골프의 미래로 각광받는 노승열은 10일 우정힐스에서 열린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 마지막 날 산과 러프와 벙커를 헤매며 최악의 경기를 했다. 그는 10타 뒤진 양용은에게 역전을 허용해 손에 넣은 듯하던 우승컵을 내줬다. [천안=연합뉴스]

야구와 골프는 친구다. 골프의 가장 적절한 한자 번역은 야구(野球)로 보인다. 야구에 선수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들판에서 공을 막대기로 때리는 골프가 야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두 스포츠는 비슷하다. 축구 등과 달리 야구와 골프는 경기가 자주 끊어진다. 이 틈에 근육이 아니라 뇌가 활동하게 된다. 그래서 골프와 야구는 육체의 본능이 아니라 뇌가 지배하는 대표적인 멘털 스포츠다. 두 스포츠는 배가 나와도 할 수 있는 이상한 운동이라는 조소를 받기도 한다.

프로골프의 역사를 바꾼 ‘대역전패’

스티브 블래스라는 투수가 있었다. 야구와 골프에서 모두 유명하다. 1972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19승을 거둔 위대한 피처였는데 이듬해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88이닝에 볼넷이 84개나 됐다. 이런저런 심리 치료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74년 마이너리그에 갔다가 올라와 5이닝 동안 볼넷 7개를 내주면서 8실점한 다음 은퇴했다.

그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것을 스티브 블래스 병이라고 한다.

스티브 블래스

블래스는 은퇴 후 심심풀이로 한 골프는 잘 했다. 한 라운드에서 홀인원을 두 번이나 해 화제가 됐다. 프로골퍼들 중에서도 한 라운드에 홀인원을 두 번 한 것은 유례가 없다.

프로골퍼들도 블래스 병을 앓는다. 블래스가 스트라이크존을 찾지 못한 것처럼 갑자기 페어웨이와 그린을 찾지 못하는 일이 종종 나온다.

10일 끝난 코오롱 한국오픈에서 4라운드를 선두로 출발한 노승열은 10타 뒤져 있던 양용은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전날까지 9언더파를 치며 펄펄 날았던 그는 이날 79타를 쳤다. 그의 공은 산으로, 러프로, 벙커로, 코스 바깥으로 나갔다.

양용은의 10타 차 역전승은 국내 기록이다. 해외 주요 투어에서도 10타 차 역전승은 단 한 번 나왔다. 1999년 카누스티에서 벌어진 디오픈 챔피언십에서 폴 로리는 선두 장 방 드벨드에 10타 뒤진 채 최종 라운드를 시작했다가 우승했다. 폴 로리는 연장까지 치러 이겼으나 양용은은 최종 성적에서 2타를 앞섰다.

양용은 입장에선 10타 차 역전승이지만 노승열이 10타 차 역전패를 당했다고 할 수는 없다. 노승열은 4라운드를 2위인 김비오에게 5타 앞선 채 시작했기 때문에 5타 리드를 지키지 못한 역전패가 된다. 이는 국내 타이기록이다. 95년 패스포트 오픈에서 김종덕이 비제이 싱에게 5타 차 역전패를 당한 적이 있다.

해외에서 최다 타수 역전패는 6타 차다. 모두 여섯 번이 나왔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96년 마스터스에서였다. 그레그 노먼은 닉 팔도에 6타 앞선 채 호기롭게 최종 라운드를 시작했다가 더블보기 2개와 보기 5개를 하며 78타를 쳤다. 65타를 친 팔도에게 무려 5타 뒤진 채로 경기를 끝냈다.

큰 타수 차로 앞서가다가 상대의 낚싯줄에 끌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선수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96년 마스터스 12번 홀 개울에 공을 빠뜨린 이후 희망을 잃고 고개 숙인 노먼을 두고 미국 언론은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 같다”고 표현했다. 경기 후 팔도는 노먼을 끌어안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두 선수는 그 내용에 대해서 입을 다물다 노먼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용을 공개했다. “저 녀석들이 너를 주눅들지 못하게 하라(Don’t let the bastards get you down)”였다.

‘저 녀석들’은 언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과 팬들이 팔도의 충고를 들어줄 리는 없다. 노먼의 참담한 역전패는 마스터스를 앞두곤 매번 등장하는 안주거리다. 노먼 자신도 그 악몽을 이기지 못했다. 테니스 스타 출신 크리스 에버트를 만나기 전까지 노먼은 메이저대회에서 우승 경쟁을 하지 못했다. 99년 오픈 챔피언십 마지막 홀 직전까지 3타 차 선두였다가 트리플 보기로 우승을 헌납한 장 방 드밸드도 이후 골프계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66년 US오픈에서 9홀을 남기고 빌리 캐스퍼에게 7타를 앞서다 역전 당한 아널드 파머도 이후 급격한 몰락을 했다. 98년 유러피언투어 조니워커 클래식에서 우즈에게 8타를 앞서다 뒤집힌 어니 엘스는 우즈 공포증에 빠졌다. 그는 우즈가 우승한 대회에서 가장 2위를 많이 한 선수로 남아 있다.

갑자기 난조에 빠져 역전의 올가미에 걸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남의 경기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크다. 5타 차 역전패를 당했던 김종덕은 “잘 될 때는 보기를 해도 그러려니 하고 인정하는데 쫓기다 마음이 급해지면 버디를 하려고 덤벼들게 되고, 그러다 엉기게 된다”고 말했다. 상대는 그런 심리를 부추긴다. 95년 패스포트 오픈에서 비제이 싱은 짧지만 위험한 파 4홀에서 드라이버를 힘껏 휘둘러 1온을 시키고 긴 파 5에서도 페어웨이에서 세컨드샷을 드라이버로 쳐서 올리곤 했다.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담 없이 경기한 싱에게 김종덕이 말린 것이다.

김종덕은 “이번 대회에서 노승열이 그렇더라”고 말했다. 노승열은 첫 홀에서 불운했다. 티샷이 약간 엇나갔는데 공은 거리를 표시하는 페어웨이 옆 작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공이 나무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노승열은 벌타를 받아야 했다. 김종덕은 “노승열이 불운에 기분이 나빠진데다 양용은이 쫓아오자 자신의 게임플랜을 잊은 것 같다. 이후엔 조심해야 할 홀에 있던 함정에 모두 걸려들더라”고 말했다. 아프지도 않고 자신감을 잃을 만한 충격을 받지도 않은 스티브 블래스 병은 명쾌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근사한 설명은 ‘작은 실수 하나를 만회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다가 리듬을 잃었다’는 것이다. 노승열의 예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원 J골프 해설위원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와 싸워야 한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의 경기, 스코어보드 등은 수시로 변하는 변수이고, 골프 코스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상수인데 움직이는 목표를 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잭 니클라우스도 “골퍼는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경기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박원 위원은 “다른 선수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볼을 목표지점으로 보내는 것)을 잊게 만들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열쇠를 남에게 넘겨주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바비 존스, 벤 호건, 잭 니클라우스, (스캔들 이전의) 타이거 우즈는 골프를 자신과 골프 코스와의 개인적인 경기로만 여겼다. 김종덕 프로도 “게임이 안 풀릴수록 연습라운드에 했던 공략법 그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골퍼도 라운드 도중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샷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박 위원은 “상대를 자신의 경기에 끌어 오려는 동반자에 당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원리는 이렇다. 장타자는 긴 파 3홀 등에서 ‘5번 아이언을 달라’고 동반자가 듣도록 크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5번 우드를 치려던 동반자는 창피해서 하이브리드를 잡고 힘이 들어가 큰 실수를 하게 된다. 상대의 경기에 말리지 말고 오히려 “5번 우드를 달라”고 큰 소리로 얘기하면 장타자가 자신의 클럽 선택을 의심해 실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양용은은 경기 후 “노승열이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승열은 대회가 끝난 직후 아시안투어 대회가 열리는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그는 아시안투어에서 상금랭킹 1위이며 올해 말레이시아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다. 좋은 기억이 있는 곳으로의 좋은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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