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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코 높여드립니다” … 1930년대에 등장한 성형수술 권유 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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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소설 ‘남편의 변명’의 삽화. 의사가 쌍꺼풀 수술, 융비술 등 미용성형 수술을 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소설 ‘남편의 변명’의 삽화. 의사가 쌍꺼풀 수술, 융비술 등 미용성형 수술을 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한국에서 성형수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경성의전을 졸업한 청화의원 원장 김은선에 따르면 쌍꺼풀 수술이나 융비술(隆鼻術)은 1930년 당시 조선서는 아직 하는 데가 없었고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고 한다(‘해학 속에 실정(實情)’, 『별건곤』1930. 5). 한국의 본격적인 성형외과학은 한국전쟁 중 미 군의관에 의해 소개됐으며, 1960년대에 전문진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음 소설의 한 대목처럼 1930년대 중·후반에는 한국에도 일본의사나 비전문의에 의한 성형수술이 매체를 통해 꽤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아내가 밖에 나간 사이에 대체 그 놈의 책이 뭔가 하고 나는 방바닥에 엎어 놓인 것을 슬쩍 뒤집고 보니 ‘XX여성잡지 부록 부인의전’, 내 아내 점순 여사가 골똘히 보신 대목은 산과나 부인과도 아니요, 내과도 아니요, 미용정형외과인 모양이었습니다.(중략) 부인네가 보아 몹시 회가 동할 만큼 자기의 기술선전을 한 모 의학박사의 집필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놈의 코 타령은 무어라고 써 있나 하고 책장을 두어 장 넘기고 보니 거기에는 석랍주사법이니 상아융비법이니, 또 인체지방 융비법이니….”(김택웅, ‘남편의 변명’, 『여성』, 1937. 7).

 즉 오늘날 여성잡지에 수십 개씩 실리는 미용성형 광고가 이미 1930년대 후반부터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신문에서는 쌍꺼풀수술이나 융비술뿐 아니라 해외에서 시도됐던 가슴성형(‘첨단을 걷는 젖의 미용술’, 『조선일보』, 1938. 6. 19), 다리성형(‘안짱다리와 수중다리를 고칠 수 있다’, 『조선일보』, 1929. 7. 14)의 수술 사례까지 상세히 알려줘 가며 여성들에게 미모 가꾸기를 부추겼다. 대중매체를 통한 미용성형수술법의 소개와 홍보는, 여성들로 하여금 부모님이 물려준 몸에 ‘감히’ 칼을 대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렇듯 매체는 과잉정보를 제공해가며 여성들에게 성형수술을 권하는 한편으로 위험하고 부자연스럽다며 이를 억압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래서 융비술을 받고 싶다는 어떤 여성의 고민 상담에 신문 카운슬러는 다음처럼 무성의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위생문답 : 융비술에 대한 문의

 (문)20세 처녀이온데, 코가 얕아서 남모르는 비관을 하던 중 반갑게도 코를 높일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곧 실행하려 하오나 동무의 말을 들으니 시일을 경과하면 코가 삐뚤어진다는 둥 코 살색이 푸르다는 둥 늙으면 흉해서 볼 수가 없다는 둥 여러 가지 말을 하니 얼른 실행키도 무섭습니다. 그리고 음성도 이상해진다 하니 그게 정말일까요? -용산 일 독자

 (답)천연적으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조선중앙일보』 1935. 5. 1)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