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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광부 69일 만에 생환] 피말리는 구조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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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당초 이날 밤 12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오후 8시로 앞당겨졌다가, 다시 오후 10시로 미뤄졌다. 하지만 막상 오후 10시가 돼서도 구조작업은 시작되지 않았다. 최종 테스트 결과 칠레 해군이 제작한 4m 높이의 구조용 캡슐 ‘페닉스(불사조)’에서 작은 결함이 발견됐고, 이를 수리하느라 시간이 걸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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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20분 ‘페닉스’는 광부들의 탈출을 도울 광산 구조 전문가 마누엘 곤살레스를 태운 채 하강을 시작했다. 그리고 약 16분 뒤 첫 함성이 터졌다. 캡슐이 매몰 광부들이 모여 있는 지하 피신처 천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TV로 중계됐기 때문이다. 광부들이 직접 촬영한 이 동영상은 지상 구조팀 컴퓨터 모니터를 거쳐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사고 광산 인근 코피아포 시내 광장에 모여 대형 스크린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칠레 국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곤살레스는 캡슐에서 내려 힘차게 광부들을 포옹했다. 지하 700m의 깊은 어둠 속에 고립돼 있던 광부들로서는 69일만에 처음 만나는 ‘외부인’이었다. 구조 장면을 중계하던 미 CNN의 유명 앵커 앤더슨 쿠퍼의 입에선 “정말 믿기 힘들다”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함성은 13일 0시11분에 터졌다. 맨 처음 구조 캡슐에 오른 광부 플로렌시오 아발로스(31)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캡슐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과 구조팀 대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치! 치! 치! 레! 레! 레!(칠레)” “칠레! 비바(만세) 칠레!” 등을 연호했다.

첫 구조 성공의 환희는 광산 밖에서도 물결쳤다. 외신들은 칠레 전역의 교회가 일제히 타종을 하고 거리의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다고 전했다. 캡슐이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은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인 약 16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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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로스는 한밤중임에도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올라왔다. 오랜 기간 어둠 속에 머문 만큼,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외엔 두 달 넘게 지하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건강해 보였다. 그는 울먹이는 둘째 아들 바이로(7)를 힘차게 포옹했다.

갱도 안에서 아발로스는 ‘넘버 2’였다. 함께 매몰된 동생 르넹(29)을 돌보는 한편, 리더인 작업반장 루이스 우르수아(54)를 도와 광부들을 이끌었다. 구조팀이 내려보낸 카메라로 동료들의 모습을 찍어 보내 ‘카메라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체력은 광부들 중 가장 좋은 축에 속했다. 그가 정신적 부담이 큰 첫 캡슐 탑승자로 결정된 데는 이 같은 리더십과 신체 조건이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르수아는 갱도 안에서 만 하루 이상을 더 머문 뒤 맨 마지막으로 캡슐을 탈 예정이다.

이후 구출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약 한 시간 뒤 땅 위에 도착한 두 번째 구출 광부 마리오 세풀베다(40)는 아발로스보다 더 여유가 넘쳤다. 캡슐에서 내리자마자 갱도에서 노란색 백에 담아 가져온 돌덩이들을 주위 사람들과 피녜라 대통령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했다. 캡슐 승강장 아래로 내려가 동료 광부들과 포옹하며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고함을 쳤다. 불끈 쥔 주먹을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세풀베다에 이어 후안 안드레스 이야네(52), 매몰 광부 중 유일한 볼리비아 인인 카를로스 마마니(23), 최연소자인 지미 산체스(19) 등이 차례로 지상으로 나왔다. 구조작업은 캡슐 터널의 안전과 광부들의 건강 상태 등을 고려, 1초에 약 1m씩 1시간당 1명의 속도로 진행됐다.

◆숫자 ‘33’ 행운의 숫자로=광부들에 대한 구조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칠레에서 숫자 ‘33’이 행운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이번 매몰 사고에 숫자 ‘33’과 관련된 일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매몰 사고가 일어난 8월 5일이 올해 33번째 주(週)였고, 이 사고로 지하에 갇힌 광부들이 33명이었다. T-130 굴착기를 이용해 광부들이 머물고 있는 피난처까지 구조터널을 뚫는 데 걸린 시간도 33일이다. 마지막으로 구조가 이뤄진 연도(10), 월(10), 일(13)의 합도 33이다. 칠레 방송 TVN은 숫자 ‘33’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복권을 살 때 33을 고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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