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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서희장군 위패 앞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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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바둑적 관점에서 본다면 서희는 고수다. 서희는 북방의 강자인 요(거란)의 대군을 전투가 아닌 말로 물리쳤고 오히려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혔다. 요의 본심이 중국 본토인 송나라 침략에 있음을 간파했기에 그는 작은 명분을 주고 큰 실리를 얻어냈다. 땅을 떼어 주자거나 무조건 항복하자며 전전긍긍하는 조정을 제압하고 겁먹은 왕을 설득해 국론을 통일시킨 능력도 탁월하다(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비록 천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놀라운 승부감각이고 통찰력이다. 온갖 의심과 미망, 견제를 뚫고 제대로 수를 본 뒤 싸우지 않고 이겼다. 바둑꾼이라면 당연히 서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속의 하수들은 “죽어도 안 된다”며 원칙이나 명분을 앞장세우다 번번이 판을 그르치곤 했다. 바둑판의 상황은 한 수마다 변하는 것. 서희는 정석을 익히되 바로 잊어버리는 고수를 닮았다. 역사 속의 소인배들은 편을 갈라 충성하고 그 빗나간 우국충정으로 남을 겁박해 수읽기를 오도했다. 서희 같은 인물이 고비마다 존재했다면 삼전도의 치욕이나 임진왜란의 참화가 있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서희는 최고수다.

그래서 절을 한 것인데 돌아서려니 바로 옆에 계신 강감찬 대장군을 무시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16명 위패의 맨 끝에선 피 맺힌 일편단심의 정몽주 선생이 아직도 고려를 잊지 못한 채 앉아 계신다. 이분들은 알고 있을까. 고려가 망한 뒤 조선도 망하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워지고 남북으로 갈라져 골육상쟁을 벌인 일들을 다 보고 있을까.

뉴스를 볼 때마다 다시 동북아에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진다. 남북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임진강가에 오면 그 바람이 더 세게 느껴진다. 3대 세습의 북쪽에 비상사태가 벌어졌을 때 북녘 땅이 누구 손에 떨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는 논설도 눈에 들어온다. 맞는 말이다. 중국이 강해지면 우리의 국경은 언제나 위기를 맞았다. 서희 장군이 웃는 듯하다. 웃으며 그만 집에 가라 한다.

위패들을 뒤로 하고 밖에 나오니 가을 하늘, 가을 산천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올해 가을은 유독 대단하다. 임진강을 따라 파주 쪽으로 조금 나오다 보니 경순왕릉이란 팻말이 보인다. 고랑포구 바로 옆에 망국의 왕이 가을 햇빛 아래 잠들어 있다. 천년 왕국의 신라를 왕건에게 헌납하고 그의 사위가 되어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 그게 천년 전이다. 세월은 무심해서 패자인 경순왕이나 승자인 왕건이나 지나가는 이에겐 다 흐릿한 옛날 일일 뿐이다. 천년 뒤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또 누구의 묘소를 보며 무슨 탄식을 할까.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