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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판·검사들 기업행 신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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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울지역 법원의 중견 판사로 근무 중인 A씨는 얼마 전 있은 법관 인사를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는 선배를 통해 기업체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기업체에서 제시한 조건은 3억원+α. 연봉이 8000만원가량인 그로서는 솔깃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가족과 친지들의 설득으로 법원에 남기로 했지만 언제까지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최근 들어 판사와 검사들의 기업행이 잇따르고 있다. 소위 잘 나간다는 중견 법관이 어느 날 법복을 벗고 기업체 임원으로 변신하는가 하면, 특수 수사 등으로 명성을 날리던 검사들까지 기업 법무팀 등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법조인을 향한 기업체의 '러브콜'에서 비롯됐다. 특히 국제 간 거래나 계약이 많은 대기업으로선 날이 갈수록 법률 수요가 늘어갈 수밖에 없다. 문서 한 줄이라도 잘못 썼다간 한꺼번에 수억 달러를 날릴 수도 있다. 그러니 분쟁이 생긴 뒤 사후약방문 격으로 법률 지원을 받는 것보다는 사전에 법률 검토를 거쳐 이를 막는 게 손해를 줄이는 첩경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법률지원 업무를 맡은 법무부의 한 간부는 미국의 어느 유명 음료회사가 올림픽조직위와 맺은 스폰서 계약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두툼한 계약서 쪽마다 쉼표나 접속사의 위치에서부터 단어까지 빼곡히 수정돼 있더라는 것이다. 실무자들이 작성한 계약서를 변호사들이 검토한 결과였다. 이처럼 미국 등 선진국 기업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방면에 눈을 뜨고 대비해왔던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에선 마피아 조직까지도 변호사들을 고용했을까. 따라서 우리 기업체들의 변호사 채용은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니다. 교역량이나 경제규모에 비해 오히려 늦었다고 할 수 있다.

판.검사들의 기업행은 변호사 업계의 불황과도 맞닿아 있다. 현재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된 전국의 변호사 수는 6800여명에 이른다. 여기에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1000명으로 늘어난 이후 해마다 이들 가운데 700명가량이 새 식구로 합류하고 있다. 4000여명이 활동 중인 서울의 경우 지난해 변호사 한명이 수임한 사건 수는 본안 사건을 기준으로 월평균 3건이다. 변호사들은 이 정도 사건 수임으론 사무실 유지도 어렵다고 말한다. 임대료 등이 월 800만원에 이르고 직원들의 인건비까지 감안하면 한달에 최소 1500만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건당 사건 수임료가 적게는 200만~300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까지 천차만별이어서 변호사들 주장엔 어느 정도 엄살이 섞여 있다. 하지만 변호사 수는 계속 늘어나고 조만간 법률시장까지 개방될 예정이어서 사건 수임은 그만큼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판.검사들이 기업 쪽에도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까지 기업인들을 재판 또는 수사하던 판사.검사가 기업체로 직행하는 것은 문제다. 특히 대검 중앙수사부나 지검 특수부에서 기업 비리 등을 수집.수사하던 검사가 곧장 기업체로 자리를 옮긴다면 업무 관련성 시비까지 불러올 수 있다. 공직자윤리법(제17조)에 '퇴직일로부터 2년간 퇴직 전 3년 이내에 소속했던 부서의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리 목적의 사기업체에 취업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법관들이 외부로부터 돈의 유혹을 받는다면 사법권 독립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평생법관제가 하루속히 정착돼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수 수사를 맡은 검사들은 퇴직 후 일정 기간 기업행을 스스로 피하는 게 옳다. 판.검사들의 기업행은 신중해야 한다.

신성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