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먹고사는 생태계 구축해야 좋은 기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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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호 22면

“기업 평판(Reputation)은 최고의 안전 자산이다.”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김원용 교수가 내린 정의다. 위기의 순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얘기다. 김 교수는 기업 평판 전문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기업평판과 감독당국의 인허가 관계를 분석한 김 교수의 최근 논문을 비중 있게 소개할 정도다(아래 기사). 중앙SUNDAY는 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최근 국내에서 화두로 떠오른 평판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서다.

英 이코노미스트가 주목한 기업 평판 전문가 김원용 美 컬럼비아대 교수

-왜 요즘 평판이 중요해지고 있나.
“지금까지 비즈니스 리더들은 평판을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평판이 곧 실적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평판으로 돈을 번다는 얘기인가.
“평판이 좋은 미 제약회사는 그렇지 못한 회사보다 신약 인가를 6개월 정도 빨리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신약 인가를 빨리 받으면 돈을 더 버나.
“미 제약업계에선 신약 인가가 한 달 늦어지면 매출액이 3000만 달러(340억원) 정도 감소한다는 게 정설이다. 6개월 늦으면 매출액이 1억8000만 달러(2070억원) 정도 줄어드는 셈이다.”

-감독 당국이 왜 기업 평판에 영향받을까.
“새로운 기술과 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신기술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은 감독 당국한테도 버거운 일이다. 평판이란 변수가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평판이 그 정도 위력을 발휘할 줄 몰랐다.
“좋은 평판 덕분에 일본 자동차회사 도요타가 대규모 리콜 사태를 견딜 수 있었다. 리콜 사태가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도요타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는가.”

김 교수는 “평판은 기가 막힌 자산이지만 비즈니스 리더나 기업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없는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한번 자리 잡은 평판은 비즈니스 리더가 당장 어찌해볼 수 없다. 기업에 대한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가 사람들의 뇌에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면서 형성된 인식(Perception)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꾸준히 노력해야 조금 바꿔놓을 수 있다.

-무엇이 평판을 결정할까.
“상식과는 달리 평판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질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최근 개발된 제품이나 서비스 자체가 네트워크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주면 좋겠다.
“애플의 아이폰은 얼핏 보면 단일 제품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커다란 관계망(네트워크)을 대표한다. 제품 제작자들과 애플리케이션(앱) 개발자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제품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평판은 소비자보다 개발자·협력업체의 판단에 크게 영향받는다.”

-이해 당사자들의 평가가 기업 평판에 결정적이란 말인가.
“한국에서 말하는 동반성장 시스템, 미국식으로 말해 생태계(Eco System) 또는 플랫폼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애플은 아이튠스와 아이팟, 아이폰을 통해 음원 제작자, 앱 개발자, 기기 생산자들이 같이 먹고살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여기에 제품에 반한 소비자들의 열광이 곁들여져 있다. 요즘 애플에 대한 평판이 좋아진 이유다.”

-애플 평판이 과거엔 나빴다는 말인가.
“마이크로소프트(MS)나 구글보다 나빴다. 애플은 개방성이 없는 회사였다. 빵 덩이를 혼자 독식하려고 했다.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질이 MS의 윈도보다 좋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러나 그 폐쇄성 때문에 많은 사람의 반감을 샀다.”

-평판을 기준으로 애플과 구글의 앞날도 예측할 수 있을까.
“구글의 생태계가 애플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더 나눠먹는 구조다. 최근 구글의 운영체제를 바탕으로 한 스마트폰의 판매가 아주 빠르게 늘고 있는 까닭이다.”
비즈니스 리더에게 단기 이익은 계륵이라고 한다. 최고경영자(CEO)는 연봉과 재선임 때문에 단기 실적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단기 실적만 좇다가는 기업 체력을 떨어뜨려 실적의 지속 가능성을 망가뜨릴 수 있다.

-CEO가 단기 이익을 포기하기는 사실 불가능하지 않은가.
“경영자가 생태계를 해치면 회사는 곧바로 화를 입는다. 미 제약회사들이 당장 이익과 관련이 없는 기초 연구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는 이유다.”

-미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 평판은 어떤가.
“일본 기업들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정보기술(IT) 분야에선 일본 기업들을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자동차는 과거 평판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는 듯하다.”

-한국산 차에 대한 인식이 기대만큼 좋아지지 않았는가.
“최근 현대 차 기술 수준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지만 과거 평판은 기술보다 더디게 개선되고 있다. 평판이란 게 본래 그렇다.”
국내에선 중국 기업들의 추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몇 년 안에 조선과 반도체 등에서 한국을 따라잡거나 앞서 나갈 것이란 전망이 심심치 않게 제기됐다. 하지만 평판을 기준으로 보면 얘기가 다를 듯했다.

-중국 기업들의 평판은 어떤가.
“미국인들도 중국 기업의 비용과 규모 경쟁력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신뢰성 등 평판의 경쟁력은 대수롭지 않게 본다.”

-그래도 중국제를 많이 구입하지 않는가.
“생필품 시장에선 중국산이 여전히 주류다. 하지만 첨단 바이오기술(BT) 회사들이 값싼 노동력만 믿고 중국에 생산기지를 설치하면 적잖이 손해 본다.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기 십상이다. 미 식품의약국(FDA)도 중국 생산시설에서 생산된 약에 대해선 아주 까다롭게 심사한다. 반면 한국에서 생산된 약은 비교적 쉽게 인가해준다는 게 미 제약업계 상식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한국 기업 추월이 말처럼 쉽지 않을 듯하다.
“한국 기업은 중국 회사들의 강점인 비용 경쟁력 부문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창의력이나 평판 등 유리한 마당으로 중국 기업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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