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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88) 느닷없이 찾아온 미8군 참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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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이 프랭크 밀번 장군이 지휘하는 미 1군단에 배속돼 평양 북쪽 운산으로 진격하던 무렵, 2군단은 그 동쪽인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2군단은 압록강 물을 뜨기 위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북진하다 적유령 산맥 곳곳에 미리 자리를 잡고 기습을 노리고 있던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무너졌다.

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6·25전쟁 관련 전시물. 1950년 10월 말 압록강변 초산에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모습을 재연했다. 당시 중공군은 이미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에 깊숙이 매복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과 연합군은 한동안 고전했다. [중앙포토]

우리는 당시 적에게 아군의 병력이 당하는 것을 ‘녹았다’고 표현했는데, 당시 2군단은 낯설고 괴이하기까지 한 중공군에 철저히 녹아 버렸다. 군단 산하의 7사단과 8사단이 병력 건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적에게 무너졌던 것이다.

그런 국군 2군단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미군 쪽에서 검토했던 모양이다. 나는 ‘백 야전전투사령부’를 맡아 지리산 토벌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이미 군단급의 지휘를 경험했다. 51년 중공군 춘계 대공세를 대관령에서 저지할 때 내가 이끌었던 부대가 국군 1군단이었다.

군단은 보통 사단 3개 병력을 지휘하는 전략 단위의 부대다. 사단이 단독 작전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그 앞에 나타난 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경우에는 상황이 아주 복잡해진다.

사단은 그저 정해진 병력과 틀에 따라 비교적 단순한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때에 따라 변하는 적정(敵情)에 맞춰 기민한 전술 및 전략 변화가 불가능하다. 그런 높은 수준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군단이다. 그러나 말이 군단이었지, 6·25 전쟁이 벌어진 뒤 내가 지리산 토벌작전을 마감할 때까지 상황에서의 국군 군단은 진정한 군단이 될 수 없었다. 군단이라기보다는 사단을 2~3개 정도 운용하면서 좀 더 확대된 전선을 방어하는 대부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지리산 대토벌 작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서울에 머물고 있던 미 8군 사령부의 작전참모 머제트 대령이 어느 날 남원의 야전전투사령부로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내 집무실을 들어서는 모습이 다소 수상쩍었다. 뭔가 비밀을 감추려는 듯 행동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나는 “무슨 일로 별다른 통보도 없이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특별히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갑자기 찾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내심으로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제트 대령은 “밴플리트 사령관은 북진 때 와해한 2군단을 다시 재건하겠다는 입장”이라며 “백 장군이 그 일을 맡아 해야 한다는 게 사령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새로 만드는 2군단은 100여 일 동안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백 야전전투사령부’를 중심으로 구성할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2군단이 춘천 북방에 주둔하고 있는 미 9군단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는 계획도 알려줬다. 미군으로서는 나름대로 충분한 계획을 세운 듯했다. 한국군의 전력보강 문제를 미군이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제대로 규모를 갖춘 군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력(火力)의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당시 국군이 사단급에서 1개 대대로 운영하던 105㎜ 야포로는 이 같은 화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사거리 11㎞ 정도의 105㎜ 야포를 사거리가 15㎞에 이르는 155㎜로 교체해야 했다. 사거리에서 그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제압하는 능력에서 볼 때는 하늘과 땅 차이다. 포탄의 크기에서는 더 큰 차이가 있어 실제 전장에서 둘은 적을 제압하는 화력 측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155㎜ 야포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군단을 운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제트 대령에게 “나는 그런 계획을 맡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라도 군단을 더 추가로 만들어 국군의 실력을 증강하는 게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그저 형식상의 군단 추가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군단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예하 사단을 지휘하는 데 필요한 공병단과 병참단도 필요했다. 그런 뒷받침 없이 군단을 만들어 운용하는 것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강했다. 나는 그런 여러 가지를 들어 머제트 대령에게 “2군단 만드는 데 내가 나설 생각은 없다”고 다시 말했다.

그러나 머제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거듭 2군단 재건을 맡을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백 장군, 그런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것도 따져보지 않고서 한국군 군단을 만들려고 한 게 아니다. 다 생각이 있고,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다”고 말했다. 나는 다소 놀랐다. ‘미군이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한국군 군단을 만들면서 화력을 충분히 지원하겠다는 뜻을 갖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국군이 현대화를 이루는 데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머제트는 밝은 표정으로 “미 8군은 한국 육군본부와 협조해 여러 개의 포병부대를 만들면서 공병과 보급 능력도 함께 갖추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국군이 본격적으로 무장(武裝)하기 위해서는 미 8군이 화력을 지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 화력의 원천인 포병을 양성해 국군에 직접 배속한다는 내용이니, 당시 국군의 사정으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머제트 대령에게 밴플리트 사령관과 상의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도록 재촉했다. 그의 대답은 놀라운 내용이었다. 본격적인 국군의 현대화 작업, 그 시작임이 분명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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