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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일 감독 '피와 뼈' 재일동포 사회 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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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이 자기 피가 든 깨진 술잔을 건네며 상대방을 위협하고 있다.

재일동포 감독 최양일이 역시 동포작가 양석일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피와 뼈'를 보려면 심장이 튼튼해야 한다. 작품 전체를 물들이는 폭력의 정도가 매우 강하거니와 등장인물의 사연 하나하나가 지극히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피가 철철 흐르는 엽기적 폭력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육체.심리적 폭력이 과연 어느 선까지 인내할 수 있을지 물어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감독.배우를 겸하며 현재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얼굴 표정 변화 하나 없는 '포커 페이스'로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무지막지한 권력을 행사하는 김준평을 영화사상 보기 드문 섬뜩한 캐릭터로 표현해냈다.

'피와 뼈'는 다분히 역사성이 강한 작품이다. 1923년 제주도를 떠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김준평이라는 인물의 일대기에 집중하며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전후 일본사회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재일동포를 주목한다. 일본이 패전하자 분열되는 동포사회, 남한보다 북한을 선택한 사람 등 시대적 묘사가 충실하다.

하지만 '피와 뼈'는 시대의 제약에서 자유롭다. 재일동포 감독에서 예상할 수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 혼란, 일본인에 차별받는 한국인의 애환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카메라는 오직 동포 내부에 고정된다. 오사카의 누추한 골목을 작은 왕국 삼아 '절대 권력'으로 살다간 김준평을 드러내는 것. 감독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세계 어디에도 이런 인간은 있다"고 말했었다.

김준평은 한마디로 '괴물'이다. 그에게 삶이란 욕망을 채워가는 일방통로일 뿐이다. 성욕이든, 식욕이든, 아니면 금전욕이든 그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한다. 가족애.도덕.인륜 같은 단어는 그와 어울리지 못한다. 그가 아내는 물론 다른 여인에게 뱉는 말은 "벗어" 정도. 돈 몇 푼을 놓고 진흙탕에서 아들과 주먹질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빌려간 같은 동포를 압박해 자살까지 이르게 한다. 병든 아내의 치료비조차 아까워해 아들과 '평생의 적'이 된다.

김준평에게는 갈등이 없다. 단지 오늘의 생존만이 전략이자 목표다. 반면 그런 무모성은 주변에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한다. 감독은 이런 살벌한 일상을 시종일관 냉정하게 바라본다. 나이가 들며 몰락해가는 김준평에게도, 또 그의 주먹 아래 쓰러져간 가족.친척 누구에게도 연민과 애정을 보내지 않는다. 긴장과 이완, 기승전결 같은 상식적 플롯을 배제하고 김준평으로 상징되는 척박한 시.공간으로 관객을 내몰아간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김준평에 대한 반감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슬픔이 앞서는 것도 감독의 이 같은 '지독한'객관성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김준평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감독은 이에 대한 대답을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25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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