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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수도자, 성 프란체스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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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가톨릭 성인 프란체스코(1182~1226)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그에겐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들판의 새나 짐승들과 얘기를 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흔적인 오상(五傷·예수가 십자가에서 두 손과 두 발, 옆구리에 입은 다섯 상처)이 그의 몸에 나타났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본다. “그리스도교의 성인”이라 부르고 “하느님(하나님)의 신비스런 은총을 받은 이”라고 존경한다. 가톨릭에선 매년 10월4일을 ‘축일’로 정해 그를 기린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던 레닌은 말년에 “내 생애에 성 프란체스코 같은 이가 몇 분 있었다면 피비린내 나는 혁명은 일으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데 성 프란체스코가 위대한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그건 ‘그가 받은 은총’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려준 지도’ 때문이다. 자신의 삶으로 몸소 그려낸 그 지도에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이 오롯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프란체스코에 대한 자료가 넉넉지 않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은 알아도 그의 삶은 잘 모른다. 마침 베네딕도미디어에서 프란체스코의 삶과 영성을 다룬 DVD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출시했다. 독일 공영방송 ZDF가 2007년 제작한 38분짜리 다큐멘터리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이요한 신부는 “성서에 바탕을 둔 그의 삶은 복음적 생기를 잃어가던 중세 교회에 복음적 가난의 기억을 일깨운 충격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해와 달, 새와 짐승 등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창조물 속에서 그는 창조주의 숨결을 봤다. 이런 모습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는 닫혀진, 사물의 비경(秘境)에 들어가는 입구를 프란체스코는 찾았다”고 증언했다. [베네딕도미디어 제공]

◆프란체스코의 첫 회심=젊은 시절, 프란체스코는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한센인을 만났다. 그는 평소 그들에게 심한 불쾌감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충동에 의해 프란체스코는 한센인의 손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그리고 새로운 체험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인도로 나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들한테서 느꼈던 쓰라림이 감미로움으로 변했다. 전에는 참기도 어려웠던 일이 내 영혼과 육신의 단맛으로 변했다.” 그게 프란체스코의 첫 각성(깨달음)이었다.

삶에는 크게 두 가지 맛이 있다. 하나는 쓴맛이고, 또 하나는 단맛이다. 사람들은 쓴맛은 피하고 단맛은 반긴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쓴맛과 단맛이 둘이 아님을 깨쳤던 거다. 그 이치를 알면 더 이상 쓴맛을 피할 필요가 없어진다. 쓴맛은 오히려 단맛으로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삶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도 쓴맛을 단맛으로 돌리라는 메시지가 녹아있다.

25세 때였다. 반쯤 허물어진 성당의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하다가 프란체스코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재건하여라.” 처음에 그는 벽돌로 쌓는 성당을 뜻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중세의 암흑기,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했었다. 십자군을 모병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욕망을 채우던 시대였다. 프란체스코가 받은 건 무너진 교회의 생명을 다시 세우라는 메시지였다.

◆남김 없이 나누는 삶=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굉장한 부자였다. 그런데 아들은 돈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걸 주위에 나눠줄 뿐이었다. 참다 못한 아버지는 아들을 주교에게 끌고 갔다. 일종의 재판에 넘긴 셈이다. 프란체스코는 군중 앞에서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다 벗었다. 그걸 아버지에게 건네며 “제가 가진 돈과 앞으로 받을 유산, 그리고 옷가지를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와 그렇게 극적으로 작별했다.

그런 뒤에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결혼했다. 그는 철저한 가난을 실천하며 탁발하는 수도자, 순회하는 설교자로 살았다. 많은 이가 프란체스코를 ‘가난한 수도자’로만 기억한다. 그런데 프란체스코의 목적은 물리적 가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창구였다. ‘영적인 가난’을 추수하기 위한 통로였다.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3절)

프란체스코의 수도 방식은 간결했다. 한마디로 ‘예수를 온전히 따라하기’였다. 예수의 눈, 예수의 마음, 예수의 행동을 온전히 좇아가면서 예수의 눈, 예수의 마음, 예수의 행동을 체화하는 식이었다. 그게 바로 프란체스코가 우리에게 몸소 그려준 ‘영성의 지도, 수도(修道)의 지도’이기도 하다. 나중에는 그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생겨났다.

◆오상(五傷)에 담긴 메시지=프란체스코는 해와 달, 동물들과 대화했다. 그들을 “사랑스런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새들에게 설교도 하고, 짐승들에게 십자표도 그어주었다. 어떤 이는 그걸 동물과 대화하는 프란체스코의 특별한 능력으로 간주한다. 프란체스코는 대체 왜 그랬을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그는 예수의 눈과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던 것이다. 창조물 속에서 창조주의 숨결을 본 것이다. 그건 또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시 말해 “이웃이 바로 네 몸”이라는 예수의 시선과도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프란체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알몸으로 맨땅에 눕혀달라”였다. 임종 2년 전, 그의 몸에는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상이 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흔적이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에 찔렸던 옆구리의 다섯 상처다. 사람들은 그 상처가 진짜냐, 아니냐를 따진다. 그러나 그런 식의 따짐은 의미가 없다. 핵심은 오상에 담긴 메시지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마지막 외침은 이랬다. “저의 영과 저의 혼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오리다.” 그러니 오상은 그 외침을 통과한 자에게 남는 표식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영성의 길에서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그 외침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DVD에 담긴 드라마와 인터뷰는 프란체스코의 삶을 묵상하기 위한 좋은 단초가 된다. 베네딕도미디어(www.benedictmedia.co.kr), 054-971-0630.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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