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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은 돈으로만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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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앞으로 첨단 바이오 의료기기 사업에 도전하고 싶다. 이 시장에 뛰어든 해외 기업의 동향을 알려 달라.”(이중환 케이맥㈜ 대표)

“정보분석 부서에 알려 글로벌 시장 조사를 돕겠다.”(박영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원장)

박영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원장(오른쪽)이 이중환 케이맥 대표(왼쪽)로부터 바이오 의료기기 시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KISTI는 박사급 연구원을 케이맥에 수시로 보내 시장조사와 사업화를 돕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제공]

지난달 3일 대전 소재 벤처기업 케이맥㈜ 본사. 이 회사 이중환 대표와 박영서 KISTI 원장이 나눈 대화의 일부다. 케이맥은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의 박막두께를 검사하는 장비를 만들어 올해 250억원대 매출을 기대하고 있는 회사. 이 대표는 “광학분석 분야의 원천기술을 기반으로 의료기기 사업으로 보폭을 넓히고 싶다”며 박 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뒤 한 달, 이 회사엔 KISTI 최윤정(생화학박사) 선임연구원이 ‘객원연구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이 대표의 바람대로 최 박사가 해외시장 조사부터 사업화 구상 등을 조언한다. 최 박사는 “조사 비용과 인건비를 포함하면 KISTI가 연 1억원가량을 케이맥에 지원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실효성 높은 중소기업 지원책으로 ‘재능기부’가 조명받고 있다. 경영능력과 브랜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경영·기술·교육 등의 전문 역량을 기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 도우미 된 국책연구원=KISTI는 과학기술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연구하는 국책연구기관으로 1962년 설립됐다. 지금까지는 주로 해외의 산업·기술 정보를 국내에 소개해 왔다. 요즘 KISTI는 ‘중소기업 도우미’로 나섰다. 박 원장은 중소기업 현장투어 중이다. 지난 6월 바이오 진단기기업체 나노엔텍 방문을 시작으로 케이맥이 50번째였다. 박 원장은 “지난달까지 중소기업 52곳을 다녀왔다”며 “연말까지 100곳을 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현장을 찾은 셈이다. 박 원장은 “요즘 중소기업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금 지원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 동향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지고 중소기업의 경영 역량도 높아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소기업을 찾은 박 원장이 내놓는 해법은 철저히 ‘맞춤형’이다. 경남 창원시에 있는 한 조선 협력사를 찾아서는 “수퍼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시뮬레이션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유럽의 발주 업체가 수퍼컴퓨터를 활용한 설계를 신뢰한다”고 얘기하자 곧바로 나온 조치다. 대전의 한 정보기술업체 대표가 연구인력이 모자란다고 하자 “인도에 파견나간 인턴사원을 보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KISTI의 박사급 인력은 250여 명이다. 앞으로 박사 한 사람당 두세 곳의 중소기업을 연결시켜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나가도록 도움을 줄 방침이다.

최성호 미가의료기 서울사무소장(가운데)이 김왕기 메타브랜딩BBN 대표(왼쪽)와 장덕복 중소기업진흥공단 마케팅사업처장(오른쪽)에게 자사가 개발한 ‘허리둘레가 줄어드는 기능성 의료기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메타브랜딩BBN 측이 이 제품의 새로운 브랜드 이름을 기부할 예정이다. [메타브랜딩BBN 제공]

◆중소기업 돕는 중소기업=김왕기 메타브랜딩BBN 대표는 지난 5월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마케팅 특강을 했다. 그는 ‘오케이캐쉬백’ ‘하우젠’ 같은 히트작을 만든 브랜드 네이밍 업체의 CEO다. 강의를 끝냈어도 ‘개운치 않는 무엇’이 있었다. 브랜드네이밍 전문가인 그가 보기에 중소기업 브랜드에 한참 문제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날 경쟁력 있는 제품을 내놓고도 브랜드 때문에 실패한 중소기업을 위해 ‘이름’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장덕복 마케팅사업처장의 도움을 받아 ▶매출이 10억원 이하이고 ▶종업원 10인 이하이면서 ▶경영 마인드가 건전한 기업을 지원한다는 조건도 정했다.

그후 4개월, 지난달 30일 메타브랜딩 서울 동교동 사무실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미가의료기의 최성호 서울사무소장이다. 메타브랜딩이 네이밍을 기부하는 1호 회사다. 경남 양산시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허리둘레를 줄여주는 기능성 의료기기를 개발해 2008년부터 ‘엔바디’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인 곳이다.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솔깃할 만한 제품이다.

문제는 브랜드였다. 이 제품을 개발한 기간은 6년, 브랜드 이름을 정하는 데는 채 6분이 걸리지 않았다. 최 소장은 “제품을 상용화하는 데는 6년가량 소요됐지만 브랜드 작업은 소홀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내에서조차 엔바디의 뜻을 모를 만큼 브랜드 관리가 엉망”이라고 덧붙였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 대표는 “좋은 제품을 개발해 놓고도 네이밍에 실패해 어려움을 겪는 것이 중소기업의 현실”이라면서 “제품의 기능을 쉽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내년 초 엔바디는 디자인 보완과 품질 혁신을 거쳐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최 소장은 “이제 히트할 일만 남은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김 대표는 “앞으로 연간 10곳가량의 중소기업에 브랜드 기부(약 2억5000만원)를 할 것”이라며 “중소기업과의 윈윈 모델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단체도 적극적=창업 10년째인 온라인 악기쇼핑몰 ‘스쿨뮤직’은 올해 매출 1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음악전문 중소기업치고는 괜찮은 성적표다. 이 회사 안정모 대표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 자문단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고 말했다. 전경련 자문단의 도움을 받아 배송 시스템을 정비하고 재고 관리도 치밀하게 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는 2004년부터 중소기업 CEO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왔다. 대기업 임원 출신인 100명의 자문위원이 지난 6년간 3200여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8000건이 넘는 자문 활동을 했다. 이 센터 유재준 소장은 “동반성장 문제의 핵심은 진정성과 지속성”이라며 “해당 기업·기관의 지식과 경험, 노하우를 나누는 재능 기부가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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