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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폭탄이 돼 버린 대학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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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과거에는 “대학 못 간 한(恨)”이란 것이 존재했다. 이런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리고 대학이 장사가 됐기에 무분별한 대학·대학원 신설과 정원 늘리기가 성행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 최고수준의, 그리고 세계 역사상 전무한 압도적인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나라가 됐다. 청년층의 대학교육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고, 무려 84%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학에 진학한다. 더 잘사는 나라들의 진학률을 훨씬 웃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부 대학교육의 거대한 부실화였다. 대학평가와 교수평가의 대폭 강화로 상위대학들의 교육·연구 여건은 전보다 좋아졌다. 그러나 하위대학, 특히 일부 지방사립대들은 정원도 못 채우는 상태가 심화되고 있다. 현재도 전체 대학정원이 대학진학 희망자의 숫자를 사실상 넘어섰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은 대학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가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2016년의 대학정원은 60만 명인데 고등학교 졸업생은 55만5000명밖에 안 된다.

대학원 사정도 마찬가지다. 일반대학원이건 특수대학원이건 명문대 대학원은 학벌세탁용으로 많이 이용되고, 다른 대학원들은 몇몇 경우를 빼고는 정원 채우기에 급급하다. 너무 많은 석사·박사 과정이 그동안 남발됐다. 한국 대학 학위의 가치가 형편없이 하락되고 질적으로 저하됐다. 차마 대학원 학위논문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는 수준의 논문들이 속출하고, 논문 대필도 성행한다. 국가경쟁력을 좀먹는 수준이다.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적(籍)만 걸어놓고 학교에 거의 안 다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별 문제없이 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교육 부실을 잘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다. 대학·대학원은 적어도 재학 중에는 치열하게 다니면서 공부해야 하는 곳이다.

대학 정원 증가와 부실화가 낳은 심각한 문제는 통제 불가능한 정도의 ‘기대수준의 폭발’이다. 이른바 ‘대학물’을 먹은 사람은 내실과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기대수준이 높아지고 산업현장을 기피한다. 폭발적으로 높아진 기대수준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중단 없는 고도성장밖에는 없다. 그러나 성장 동력은 꺼져 가고 있고, 지속적인 고도경제성장을 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기대수준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기대수준이 폭발하는 사회는 불안정하고 불행하다. 경제력이 강한 한국이 매우 낮은 행복수준을 보이는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갤럽이 지난 5년여 사이 전 세계 155개국을 대상으로 행복도에 대한 설문을 실시한 결과를 최근 보도했다. 한국은 56위를 기록했다. 경제위기를 겪는 그리스(50위)나 내전을 겪은 코소보(54위)보다 낮다. 기대수준 폭발을 처리하지 못해 불만에 가득 찬 한국 사회는 사실상 시한폭탄과 같다. 이미 시한폭탄은 재깍거리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묘안을 짜내도 백약이 무효다. 교과부는 2004년에 “2009년까지 358개 대학 중 87곳을 없앤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시혜성 복지혜택을 증가시키기는 쉬워도 감축하는 건 어려운 것처럼, 대학·대학원 정원도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는 것은 큰 고통을 수반한다. 한국 사회는 시한폭탄 수거와 같은 긴박함으로 대학·대학원 정원 감축에 임해야 한다.

부실대학에 대한 통폐합 유도 등 정원을 전반적으로 감축해야 한다. 현재 대학정원은 30% 이상, 석사과정은 40% 이상, 박사과정은 50% 이상을 줄여야 적정규모다. 교과부는 고통이 덜한 방법으로 후유증을 최소화시키면서 정원을 감축할 방도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각 대학들도 교과부 정책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레버리지(leverage)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경쟁력 없는 학위과정을 과감히 정리하거나 ‘협력을 통한 경쟁력 강화’의 정신으로 비슷한 수준의 대학들이 공동 대학원 과정 개설을 통한 자연스러운 정원 감축과 내실화를 추구하면서 정부 정책과 조응하는 쪽으로 노력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기록정보과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