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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필리핀 대통령들의 6·25전쟁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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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6·25전쟁 때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의 지상군 참전국인 필리핀 파견부대가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9월 19일이었다. 이때를 전후해 당시 필리핀 최대 일간지인 마닐라타임스의 종군기자로 일선에서 활약했던 사람이 후일 필리핀 민주화의 영웅이 된 니노이 아키노(Benigno Aquino) 상원의원이었다. 그의 초상화가 실린 500페소짜리 지폐 뒷면에는 그가 송고했던 ‘미국제일기병사단 38선 돌파’라는 헤드라인과 전투복 차림의 아키노 사진이 실려 있다.

약관 18세에 한국전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베니그노 아키노는 1951년 귀국 후에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KOREA’라는 영화시나리오를 써 필리핀영화아카데미의 최고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1954년 막사이사이 대통령 보좌관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한 후 타락(Tarlac) 주지사를 거쳐 1967년 36세에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정치의 복원 가능성을 상징하는 젊은 지도자로 부상한 아키노 의원을 마르코스 대통령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며 수감했다. 그 후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하던 아키노 의원은 1983년 8월 마닐라공항에서 무참히 암살되고 만다.

남편으로부터 민주화운동의 횃불을 이어받은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1986년 대통령선거에서 시민혁명운동을 주도하고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민주회복을 성취했다. 재임 6년 동안 여섯 번에 걸친 쿠데타 기도를 극복하는 등 필리핀 민주정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 그녀는 힘들고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의 미래를 밝게 열어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지난주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에 갔던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이 어머니 아키노 여사의 모교에서 명예학위를 수여받는 뉴스가 국내외에서 아키노 일가의 업적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키노 대통령 내외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인연과 우정을 이어받은 현 아키노 대통령이 한국과 필리핀의 우호관계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임을 믿고 기대한다. 지도자에 얽힌 인연은 역사의 흐름이나 국제정치에서도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코라손 아키노 여사에게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필리핀사관학교와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임관한 후 1951년 보병 소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1952년 철원 인근의 이리고지 전투에서 정찰수색대 소대장으로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다. 그는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면서도 1986년 반(反)마르코스 진영에 가담해 민주화에 기여했기에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바통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수 있었다. 라모스 대통령과 같은 참전노병(老兵)들은 물론 많은 필리핀 국민은 마닐라에서 있었던 한국전 참전60주년 기념행사를 맞아 한국과 필리핀이 함께 걸어오며 맺은 인연과 우정에 대해 특별한 감회를 나누며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꿈꾸었다.

우리 두 나라는 아시아에서 민주화를 성취한 대표적인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경제, 사회, 치안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취약점이 노출되고 있는 필리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전자투표제도나 지방분권 제도화 등 과감한 민주주의 실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시대로부터 민주화로의 전환에 성공했다는 것이 진정한 민주정치의 제도화나 함께 살아가는 시민공동체 건설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한국의 남북분단과 이념대결이란 원천적 장애에 못지않게 필리핀은 봉건적 사회구조와 계층 간 격차에 따른 불평등의 고착화란 엄청난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 인구가 9200만이란 대국이면서도 그 규모에 상응하는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작업은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기에 필리핀은 6·25로부터 60년 동안 한국이 걸어온 길을 유심히 살펴보며 참고하고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웠던 전우로서, 아시아에서 민주시민사회를 키워가는 동지로서 소중한 인연을 바탕으로 한 양국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킬 비전을 다듬어야 하겠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