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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언니들 졸업하면 선수 5명 뿐, 내년 대회는 어떻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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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호 08면

세계를 제패한 한국 여자 청소년 축구 선수들의 훈련 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왼쪽부터 김민정·김현정·김예리·김성경·홍혜지 선수. 함안=최정동 기자

여자축구가 최근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다. 17세 이하(U-17) 여자축구 대표팀이 26일 끝난 국제축구연맹(FIFA) U-17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했다. 한국이 FIFA 대회에서 거둔 첫 우승이었다. 8월에는 U-20 여자 대표팀이 U-20 월드컵에서 3위를 했다. 국민은 열광했고,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다.

U-17 여자축구 여민지 키운 함안 함성중·대산고 가보니

선수들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 됐다. 그러면서 한국 여자축구의 열악한 현실도 훤히 드러났다. 여자축구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9월)30일~1일 경남의 함안 대산고 여자축구팀과 24시간을 함께했다. 함안 대산고는 U-17 여자월드컵에서 우승컵과 골든볼(MVP)·골든부트(득점왕) 등 세 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여민지(17) 선수와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이정은(17) 선수가 다니는 학교다.

마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논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한 시간 반쯤 달려 함안 대산중·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이날은 여민지와 이정은이 금의환향하는 날. 축구부 소녀들은 덩달아 바빴다. 두 선수의 함안 시내 카퍼레이드에 동행했고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훈련을 했다. 여민지와 이정은이 하루 휴가를 받아 귀가하자 취재진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선수들은 시원섭섭했다고 한다. 한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이 잘되니 자랑스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함께 공을 차는 친구들이 유명해지니 나도 열심히 하면 잘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 같다. 하지만 어차피 언론의 관심은 민지에게만 있다. 당연하지만, 어쩐지 섭섭하기도 하다.”

선수들의 일과는 매일 비슷하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아침 산책을 한 뒤 식사를 하고 4교시 수업을 한다. 점심 식사 후에는 오후 훈련과 저녁 훈련이 이어진다. 훈련 후 잠시 앉아 TV를 시청한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 빠져 있던 선수들은 오후 10시30분이 되자 TV를 껐다.

선수들에게 일상은 거의 없다. 또래 친구들처럼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는 재미도, 1년에 하루뿐인 소풍날을 기다리는 설렘도 사치다. 한 선수는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다. 모든 선수의 꿈이다. 어릴 적 소풍날에 딱 한 번 가봤다. 언제 또 놀이공원에 가 놀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산고 김은정(30) 감독에게 하루 일과는 ‘전쟁’이다. 상황에 따라 어머니, 코치, 팀 닥터, 전력분석관, 기숙사 사감 등 1인 다역을 한다. 남자 초·중·고등학교에는 보통 감독 1명, 코치 2명이 있다. 여자 팀에는 많아야 감독·코치 1명씩이다. 골키퍼 코치가 상주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

김 감독은 “우리 팀은 코치 자리에 골키퍼 코치를 고용했다. 필드 훈련은 내가 지도하고, 대신 골키퍼들에게 적절한 훈련을 시켜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나마 최근 코치가 그만두는 바람에 김 감독이 할 일이 늘었다.

저녁 훈련이 끝난 오후 9시쯤 김 감독은 간식을 챙겨준 뒤 선수들의 축구 일지를 검사했다. 부상 선수를 불러 치료하고 방에 들어가니 오후 11시. 다음에 상대할 팀을 비디오로 분석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 오전 7시부터 새벽 1~2시까지 ‘살인 일정’이 이어진다.

격무에 비하면 보수는 많지 않다. 시·도 체육회에서는 각 학교 여자축구 지도자들에게 한 달 120만원가량을 지원한다. 기본급인 셈이다. 여기에 학교에서 많지 않은 활동비를 지급한다. 김 감독은 “가정이 있는 감독들은 생활이 어렵다”고 귀띔했다.

함안 대산고의 숙소와 훈련 시설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숙소는 3층짜리 강당 건물 1층에 있다. 온수가 나오는 샤워실과 커다란 LCD TV가 붙어 있는 선수들의 방은 깔끔했다. 이 숙소는 올해 2월에 새로 지었다.

이전까지 선수들은 함안공설운동장 콘크리트 외벽에 칸막이를 쳐 만든 가건물에서 지냈다. 창문이 없어 환기가 되지 않았고 여름이면 습기와 열기에, 겨울이면 냉기에 괴로웠다. 여민지의 모교인 함성중학교 축구부가 지금도 이 숙소를 쓴다. 함성중학교는 학교 안에 새 숙소를 지어 내년 2월 이곳을 떠난다.

함성중 김슬기 코치는 “경남 쪽 학교들은 그래도 지원을 많이 해주는 편이라 환경이 해마다 나아지고 있다. 이보다 못한 환경에서 축구 하는 선수가 많다. 사실 여자축구에서 이 정도는 그리 열악한 환경도 아니다”고 말했다. “숙소 문제가 자꾸 언론에 나는 게 반갑지 않다. U-17팀이 우승하자 하루 몇 건씩 입단 문의가 온다. 하지만 이런 숙소를 보고 어떤 부모님이 딸에게 축구를 시키고 싶겠는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홍혜지(14) 선수는 “U-17 팀이 월드컵 우승을 했을 때 우리끼리 ‘이번 기회에 여자축구가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지원도 늘고, 후배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3학년 언니들이 나가면, 우리 팀에는 5명이 남는다. 대회에 나가려면 선수가 많이 필요하다.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동생이 늘어 우리가 내년에도 정상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꿈은 ‘태극마크’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대학 진학과 실업팀 입단이다. 올해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고등학교 팀은 16개인데 대학 팀은 6개다. 매해 120여 명의 고교 졸업자 중 70명 정도가 진학하지 못했다. 그나마 영진전문대와 위덕대는 내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두 팀이 줄면 더 많은 학생이 꿈을 접어야 한다. 대학 팀이 줄면 실업 팀도 선수 수급이 어렵다. 여자 선수들의 취업문이 좁아지는 것이다. 현재 실업팀은 모두 6개다.

박혜린(18) 선수는 “꼭 대학 팀에 가고 싶다. 그러려면 이번 전국체전에서 잘 뛰어야 한다. 우리에게 전국체전은 정말 중요하다. 대학 감독들의 눈에 들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목선경(18) 선수는 “어렵게 실업팀에 가도 주전과 비주전 선수의 월급 차가 크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선수의 부모님은 대학 졸업 후 ‘부산상무’ 팀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군인이 되면 장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린 선수들은 아직 대학·실업 팀 얘기가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의 꿈은 조금 더 소박하다. ‘더듬이 달린 버스(사이드미러가 더듬이 모양으로 달린 35인승 리무진 버스)’를 타고 대회에 나가는 것, 그리고 학교 축구장의 조명 시설이 더 환해지는 것이다.

김은정 감독의 꿈도 물었다. 김 감독은 “여자축구 환경이 갑자기 나아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원금이 늘어도 바닥까지 햇살이 들지는 않는다. 2002 월드컵 잉여금 지원이 이제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전국체전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까지 자꾸 들려서 우울하다. 전국체전이 없어지면 시·도 체육회의 지원금마저 없어질 거다. 그 지원금 없이 여자축구팀을 운영할 학교가 있을지 의문이다”며 한숨을 쉬었다.

U-17 팀은 분명 희망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 그라운드에는 불안이 공존한다. 대산고 선수들이 최근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슈퍼스타 K’다. 프로그램 도전자들은 어려운 과제와 수없이 부딪히며 수십만 대 1의 경쟁을 통과한다.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선수들도 축구계의 ‘슈퍼스타 K’를 꿈꾼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도 그라운드 안에 숨은 희망을 찾아 씩씩하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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