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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0) 산속에서 올린 횃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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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수도사단은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작전 3기 막바지 빨치산 몰이의 주공(主攻)이었다. 수도사단의 예하 각 연대는 1952년 1월 6일 지리산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한 뒤 9일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면서 작전을 벌였다. 기간은 22일까지였다. 그 와중에 벌어진 일이 이른바 ‘횃불 작전’이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수도사단의 부대원들, 이태의 『남부군』 등 빨치산 관련 저작, 당시 지리산 인근에 살면서 전투를 지켜봤던 일반 주민 등 많은 사람이 잊지 않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수도사단 26연대 1중대 3소대를 이끌었던 장창호 소대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추위가 닥치니 병사들의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3기 작전 때는 오줌을 누고 돌아서면 그대로 얼어붙을 정도의 날씨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김재열 중대장을 통해 이동화 연대장에게 불을 피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사단장이던 송요찬 장군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아예 1인당 20개씩 불을 피우라는 역발상(逆發想)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는 “불을 피우기 힘든 경우에는 관솔가지라도 꺾어 횃불을 만들어 나뭇가지에 걸어두라”는 지시까지 내렸다고 했다.

1952년 전라북도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빨치산 잔당의 공격에 대비해 보급로를 경비하던 전투경찰대 대원들이 수송트럭 기사들에게 안전하니 지나가도 좋다는 뜻으로 흰색 깃발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당시 미 시사사진잡지 ‘라이프’에 실렸던 사진이다.

지리산 주위에 포위망을 깐 뒤 빈틈없이 빨치산을 옥죄면서 올라가고 있던 수도사단 예하의 3개 연대가 지리산 안의 눈 내린 각 봉우리에 훤하게 횃불을 올린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일반적인 경우라면 수도사단은 적의 공격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달랐다. 모진 추위와 배고픔으로 산속 깊은 어둠 저편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이 광경을 지켜봤을 빨치산에게 그 횃불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절망의 신호로 비쳤을 것이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토벌대의 포위망, 그리고 거세면서 줄기찬 토벌대의 공격력을 떠올리면서 절망감에 젖었을 것으로 보인다.

토벌대의 절대적인 우세, 이제 막바지에 달한 빨치산의 운명이 매우 대조적인 힘의 불균형 상태를 보이면서 벌어진 게 수도사단의 횃불 심리전이었던 셈이다. 적은 더 이상 공격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수도사단 예하의 각 연대는 지리산 연봉(連峰)에서 밤이면 밤마다 횃불 시위를 벌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자신의 위력(威力)을 상대 앞에서 고스란히 과시하는, 말 그대로의 ‘시위(示威)’였던 것이다.

빨치산은 그렇게 몰렸다. 수도사단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아흐레 정도 지났을 무렵인 1월 18일 지리산 속 대성골 전투에서 빨치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1월 18일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빨치산은 절망적인 패배를 맛봤다. 이들은 지형이 험하고 추위가 다른 곳에 비해 더욱 심한 천왕봉과 촛대봉 일대로 모여 들었다. 토벌대의 발길이 이곳은 피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을 옥죄고 들어오던 기갑연대와 26연대는 이들을 계속 밀어붙였고, 17일 저녁에 접어들면서 세석으로부터 서남방으로 뻗은 대성골에서 빨치산 병력은 급기야 아군의 포위망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말았다.

17일 밤에 전투가 벌어졌다. 다급한 상황에 몰린 빨치산은 혈로(血路)를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왔고, 결국 최전방 고지에서나 볼 수 있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눈까지 내렸다. 눈이 사람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폭설이 쏟아졌다. 빨치산 부대원들은 눈을 헤치고 토벌대의 틈을 노려 야간 공격을 벌였다.

26연대 1중대 3소대의 장창호 소대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8일 새벽, 적의 공격에 놀라 깨었다. 골짜기 아래에서 흰 광목을 뒤집어 쓴 적들이 양손으로 눈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적기가(赤旗歌)’를 소리 높여 부르며 우리를 향해 골짜기를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뒤쪽에서는 피리소리도 들렸다….”

적의 공세는 잡혀 죽느냐, 아니면 뚫고 다시 도망치느냐를 가르는 막바지의 절박함을 담은 것이었다. 장창호 소대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혹한의 지리산 추위는 소대원들에게 지급된 M1 소총을 얼려 놓았다. 총이 발사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대원들은 군홧발로 소총의 노리쇠 손잡이를 내리찍었다. 소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빨치산들은 재빨리 바위 틈에 몸을 숨겼다.

빨치산은 그래도 혈로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다시 골짜기를 기어올랐다. 하나 둘씩 적은 쓰러지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퍼붓는 수도사단의 맹공을 헐벗고 굶주린 빨치산들이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전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빨치산 주력이 물러간 곳을 치고 들어간 장창호 소대장의 눈에 바위 틈에 웅크리고 앉은 나이 어린 빨치산들이 들어왔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은 앳되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여자 아이들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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