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자궁 속에 든 아이처럼 눈을 감은 백남준. 사진가인 우테 클롭하우스가 1963년 쾰른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회고전에 출품됐다. 풍선은 그가 즐겨쓴 질의 이미지였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이상(李箱)의 시를 연상시키는 이 묵시록과도 같은 글은 우주적 영혼으로 지구를 떠돌았던 그의 장쾌한 행보를 돌아보게 한다. 백남준(1932~2006)은 흔히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 불리지만 이제 그 진부하고도 해묵은 수식어는 버릴 때가 되었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전’은 사후 4년 만에 시작되는 ‘백남준 바로 세우기‘의 팡파르였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일본, 독일 등지로 더 자유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 떠돈 유목민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다가 전위예술로 확장한 그의 예술세계는 과학과 자연, 수학과 신비주의 등 학문의 전 영역을 감싸 안고 돌아치는 통섭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광활한 정신의 파노라마를 알아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소외를 분출하는 에너지의 행위예술로 돌파하던 그의 초기 독일 시절은 좌충우돌 파격과 잔혹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와 쾰른 등지를 무대로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무명 예술가로 살았을 때 그가 남긴 편지 한 통은 당시의 심정을 해학 속에 버무리고 있다. “비평가는 공연 전에 자리를 떴고, 사진가는 공연 후에 왔습니다. 내 고통이 헛수고였나요? 하 하 하, 진정 난 타락했군요.”
1967년 첼로 연주자 샬롯 무어맨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퍼포먼스의 한 장면. 샬롯 무어맨이 웃통을 벗은 백남준을 첼로 삼아 연주하고 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들고, 모든 상식을 수시로 파괴하고 변화시키려는 그의 능력은 ‘소통의 신’ 에르메스를 닮았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라인강변 마리의 작업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연구하려 틀어박혔던 주택가 차고 자리를 둘러본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그는 자신이 재미있게 본 것들,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경지를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도록 고안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식으로 박제된 예술에서 벗어나 인간이 훨씬 더 큰 해방감을 느끼도록, 육신과 정신을 편안하게 놀릴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스스로 ‘실험 TV’ 보는 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눈을 사분의 삼 감으세요. 그리고 30분 이상 보세요.”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뻔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었다. 인간의 사고를 더 널리 뻗어나가게 늘려주고 자극하며 각성시키는 그의 전 작업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가를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체험했다. ‘레이저 콘’ 밑에 누운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건 말건 일어날 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산란 속에서 온 몸을 열어놓고 자신의 존재를 되살피고 있었다. 그런 예술을 인류에 봉헌한 백남준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 ‘우린 백남준의 나라다’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뒤셀도르프·쾰른·부퍼탈(독일)=정재숙 선임기자
백남준 이해에 도움이 되는 영화 10편
① 스탠리 큐브릭, ‘2001 : 스페이스 오딧세이’
원시도구에서 우주정거장까지 단숨에 연결되는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의 우주적 재탄생의 비전.
② 안노 히데아키, ‘에반게리온’시리즈
소위 ‘인류보완계획’이라는 인류의 진화 프로그램 실행과 모태 회귀 본능을 활용한 에바기의 디자인.
③ 이안, ‘테이킹 우드스탁’
히피의 유토피아 정신을 만끽하고 의식의 감각적 혁명을 꿈꾸었던 1960년대 ‘우드스탁’ 축제는 백남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④ 김기영, ‘양산도’
백남준과 같은 세대의 감독이 보여주는 컬트적인 연출 감각과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의 의지.
⑤ 장 뤽 고다르, ‘미치광이 삐에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고다르의 영화는 ‘점프컷’ 이상의 관계라 할 수 있다.
⑥ 테리 길리엄, ‘바론의 대모험’
‘허풍선이 남작’의 좌충우돌 모험 활극으로 신화적 상상력과 별종의 테크놀로지가 교묘하게 혼합된 판타지.
⑦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열대병’
인간이 호랑이에 씌이고, 호랑이는 가죽만 벗으면 인간으로 변신하는 신화적 상상력의 돌연한 출현.
⑧ 마이클 커티즈, ‘카사블랑카’
백남준은 바바리 코트에 중절모를 쓴 험프리 보가트의 ‘코스프레’를 즐겼다.
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비디오 드롬’
비디오 매체에 감염된 신체가 변화하는 사이버네틱 과정.
⑩ 스탄 브래키지, ‘독스타 맨’
필름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실험하여 백남준이 극찬했던 작품.
정리=김남수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