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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브랜드 백남준 <상> 그의 발자취를 좇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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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자궁 속에 든 아이처럼 눈을 감은 백남준. 사진가인 우테 클롭하우스가 1963년 쾰른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회고전에 출품됐다. 풍선은 그가 즐겨쓴 질의 이미지였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여기 얼굴을 감싸 쥔 한 남자가 있다. 1965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예언했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이상(李箱)의 시를 연상시키는 이 묵시록과도 같은 글은 우주적 영혼으로 지구를 떠돌았던 그의 장쾌한 행보를 돌아보게 한다. 백남준(1932~2006)은 흔히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 불리지만 이제 그 진부하고도 해묵은 수식어는 버릴 때가 되었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전’은 사후 4년 만에 시작되는 ‘백남준 바로 세우기‘의 팡파르였다.

<본지 9월 14일자 26면 참조>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일본, 독일 등지로 더 자유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 떠돈 유목민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다가 전위예술로 확장한 그의 예술세계는 과학과 자연, 수학과 신비주의 등 학문의 전 영역을 감싸 안고 돌아치는 통섭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광활한 정신의 파노라마를 알아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소외를 분출하는 에너지의 행위예술로 돌파하던 그의 초기 독일 시절은 좌충우돌 파격과 잔혹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와 쾰른 등지를 무대로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무명 예술가로 살았을 때 그가 남긴 편지 한 통은 당시의 심정을 해학 속에 버무리고 있다. “비평가는 공연 전에 자리를 떴고, 사진가는 공연 후에 왔습니다. 내 고통이 헛수고였나요? 하 하 하, 진정 난 타락했군요.”

1967년 첼로 연주자 샬롯 무어맨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퍼포먼스의 한 장면. 샬롯 무어맨이 웃통을 벗은 백남준을 첼로 삼아 연주하고 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들고, 모든 상식을 수시로 파괴하고 변화시키려는 그의 능력은 ‘소통의 신’ 에르메스를 닮았다.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쾰른의 라인강변 린트가세 28번지 건물 꼭대기 다락방은 백남준의 첫 행위예술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1960년 10월 6일 마리 바우어마이스터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연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그는 쇼팽을 연주하다가 머리로 건반을 내리친 뒤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선배 전위예술가인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다. 단단한 기성체계를 박살내는 것, 수천 년 서구 예술의 우월성을 깨부수는 것, 한마디로 기존 예술의 죽음을 선포하고 더 자유로운 인류 보편의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백남준의 꿈이었다.

라인강변 마리의 작업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연구하려 틀어박혔던 주택가 차고 자리를 둘러본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그는 자신이 재미있게 본 것들,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경지를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도록 고안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식으로 박제된 예술에서 벗어나 인간이 훨씬 더 큰 해방감을 느끼도록, 육신과 정신을 편안하게 놀릴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스스로 ‘실험 TV’ 보는 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눈을 사분의 삼 감으세요. 그리고 30분 이상 보세요.”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뻔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었다. 인간의 사고를 더 널리 뻗어나가게 늘려주고 자극하며 각성시키는 그의 전 작업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가를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체험했다. ‘레이저 콘’ 밑에 누운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건 말건 일어날 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산란 속에서 온 몸을 열어놓고 자신의 존재를 되살피고 있었다. 그런 예술을 인류에 봉헌한 백남준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 ‘우린 백남준의 나라다’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뒤셀도르프·쾰른·부퍼탈(독일)=정재숙 선임기자

백남준 이해에 도움이 되는 영화 10편

① 스탠리 큐브릭, ‘2001 : 스페이스 오딧세이’

원시도구에서 우주정거장까지 단숨에 연결되는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의 우주적 재탄생의 비전.

② 안노 히데아키, ‘에반게리온’시리즈

소위 ‘인류보완계획’이라는 인류의 진화 프로그램 실행과 모태 회귀 본능을 활용한 에바기의 디자인.

③ 이안, ‘테이킹 우드스탁’

히피의 유토피아 정신을 만끽하고 의식의 감각적 혁명을 꿈꾸었던 1960년대 ‘우드스탁’ 축제는 백남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④ 김기영, ‘양산도’

백남준과 같은 세대의 감독이 보여주는 컬트적인 연출 감각과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의 의지.

⑤ 장 뤽 고다르, ‘미치광이 삐에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고다르의 영화는 ‘점프컷’ 이상의 관계라 할 수 있다.

⑥ 테리 길리엄, ‘바론의 대모험’

‘허풍선이 남작’의 좌충우돌 모험 활극으로 신화적 상상력과 별종의 테크놀로지가 교묘하게 혼합된 판타지.

⑦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열대병’

인간이 호랑이에 씌이고, 호랑이는 가죽만 벗으면 인간으로 변신하는 신화적 상상력의 돌연한 출현.

⑧ 마이클 커티즈, ‘카사블랑카’

백남준은 바바리 코트에 중절모를 쓴 험프리 보가트의 ‘코스프레’를 즐겼다.

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비디오 드롬’

비디오 매체에 감염된 신체가 변화하는 사이버네틱 과정.

⑩ 스탄 브래키지, ‘독스타 맨’

필름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실험하여 백남준이 극찬했던 작품.

정리=김남수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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