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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 교육부총리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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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제 '코끼리 밥통'은 부의 상징이었다. 일본 가전제품의 수입이 금지됐던 시절 코끼리 밥통이 있다는 건 그만큼 힘있는 신분이란 뜻도 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마디로 국내 가전사들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산 밥통은 아무리 해도 코끼리 밥통만큼 밥맛을 못 냈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밥에서 냄새가 났다.

시장이 잘 돌아간다면 소비자가 외면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망해야 한다. 그러나 국내 가전사들은 정부의 보호 때문에 형편없는 밥통을 팔면서도 끄떡없었다. 힘있고 돈있는 사람은 코끼리 밥통을 사다 썼지만 대다수 서민은 울며 겨자먹기로 엉터리 제품을 써야 했다.

90년대 일본 가전제품에 대한 수입규제를 풀려 하자 국내 가전사들은 아우성쳤다. 국내 산업은 다 죽고 국내 시장은 일본 기업이 말아먹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수입규제가 없어진 지금 코끼리 밥통을 찾는 주부는 보기 어렵다. 밥통은 이제 우리가 일본으로 역수출할 판이다. 시장이 열리자 국내 가전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날밤을 새워가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결과다.

그럼, 우리의 학교는 어떤가. 90년 33%이던 대학 진학률은 지난해 81%까지 높아졌다. 이젠 대학 못간 게 한이 됐던 시절은 지났다. 공교육비 지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7.1%로 일본(4.6%).독일(5.3%)은 물론 미국(7%)보다 높다. 그러나 기업에선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탄식한다.

사교육 시장도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다. 2003년 국내 사교육비는 줄잡아 14조원에 이른다. 초.중.고의 조기 유학생은 96년 3573명에서 8년 만에 무려 1만149명으로 세 배가 됐다. 강남의 고액과외와 조기유학은 80년대 코끼리 밥통처럼 신분과 부의 상징이 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리의 공교육이 소비자가 원하는 교육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학교는 도태돼야 마땅하나 정부의 보호 때문에 엉터리 서비스를 버젓이 팔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피해는 비싼 사교육도, 조기유학도 시킬 형편이 못 되는 서민이 가장 많이 본다. 공교육의 질을 높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김진표 신임 교육부총리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김 부총리는 경제부총리 시절 교육인적자원부에 건의한 자료에서 교육개혁의 방향으로 '분권과 자치, 국제화'를 내세운 바 있다. 학교에 자율권을 가능한 한 많이 주되, 시장은 점진적으로 열어 국내 학교끼리는 물론 외국 학교와도 경쟁을 벌이게 하자는 얘기다.

경쟁이 도입되면 교육서비스의 공급자인 교직원과 학교는 피곤해진다. 그동안엔 서비스의 품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앞으론 질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밥그릇'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건 물론 같은 값에 훨씬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좋다.

김 부총리의 임용에 대해 교직원단체는 "교육 문외한이 공교육을 망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 교육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공교육의 질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 묻고 싶다.

교직원단체에선 교육은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라는 주장도 내세운다. 그러나 '대학은 산업'이란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교육에도 경제논리.산업논리가 적용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젠 교육전문가들이 경제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가 되지 않았을까.

정경민 경제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