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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패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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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로널드 레이건(1911~2004) 전 대통령은 뛰어난 연설 능력과 함께 가장 세련된 옷맵시를 가진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젊고 진취적인 멋을 추구했다면 레이건은 원숙하고 노련한 이미지를 풍겼다. 레이건은 “외관(look)은 메시지”라는 의상 철학을 갖고 있었다. ‘강하고 풍족한 미국’이라는 그의 보수주의 이념은 공식 석상에 즐겨 입었던 짙은 색상의 정장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의상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도구이자 수단으로 활용했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각 개인의 의상은 그 자체가 기호 언어이며 무언(無言)의 신호체계, 곧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존재한다고 정의한다. 말처럼 옷에서도 특유의 어휘와 음색이 있다고 본 것이다. 외모와 말, 행동 외에 그 사람의 성향이나 성격을 판단하는 좋은 단초를 의상에서 찾기도 한다. 정부의 고위 관리나 보수 정치인을 일컬어 부르는 ‘그레이 슈트(Gray Suits)족’은 색상을 통해 권위적인 풍토를 은유한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신언서판(身言書判), 즉 몸·말씨·글씨·판단의 네 가지를 인물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복장을 통해 정치적 성향을 나타낸 일도 빚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당파의 대립이 극심해지다 보니 의관의 양식조차 서로 달랐다. 머리에 쓰던 복건(幅巾)이 그것이었다. 정조 때 서인들은 복건을 착용한 반면 남인들은 착용하지 않았다. 정조는 “한 조정에 있으면서 어찌 복색이 다를 수 있으랴”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결국 당시의 주류 세력이었던 서인을 따라 남인도 복건을 씀으로써 논란이 마무리됐다. 의상이 권력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최근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각국의 ‘독재자’ 10명의 패션을 분석해 보도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인민복을 비롯해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카다피 리비아 국가 원수,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등의 의상이 품평 대상에 올랐다. “독재자들은 복장을 통해 때론 정치를, 때론 힘(Power)을 보여준다”는 게 FP의 결론이다.

패션은 이제 연예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요즘 학계에선 정치사회학적 연구가 활발하다. 패션을 개인과 집단의 사회적·정치적 위상과 철학을 내보이는 메시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개성과 철학의 날개를 단 옷으로 추석빔을 차려입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