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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전 16패, 229실점 3득점 … 보통 학생들의 무한도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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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호 08면

상문고 축구팀은 훈련에만 몰입하지 않는다. 수업을 다 받으면서 운동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1승을 행복한 꿈으로 간직하고 땀 흘린다. 김민규 기자

‘무한도전’은 오래도록 사랑받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도전을 통해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이 프로그램 초창기. 출연자들은 전철과 100m달리기를 했다. 사람이 기차와 달려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당연히’ 첫 달음질은 큰 격차가 났다. 아무도 지하철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포기하지 않았다. 전철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기 위해 계속 달렸다. 전철과 출연자의 격차는 점점 줄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출연자가 전철보다 먼저 들어왔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시청자들의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학교 스포츠의 모범답안, 서울 상문고 축구부

한국 체육계에 ‘무한도전’ 중인 고등학교가 하나 있다. 엘리트 학생선수를 상대로 공부만 하던 일반학생 축구선수가 도전장을 냈다. 성적은 신통치 않다. 아니 참담하다. 3일 서울 성북구 노들구장에서 이들은 0-19라는 큰 점수 차로 졌다. 익숙한 패배다. 오히려 나아진 것이다. 지금까지 16경기를 하면서 넣은 골은 3골. 내준 골은 229골이다. 일반 학생들이 오로지 축구만 하며 자란 선수를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전철과 달리기를 해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당연히 승리는 없다.

2010년 전국축구리그 고등부의 서울 동부 권역에서 10개 팀 중 10위에 올라 있는 상문고등학교 이야기다. 매번 패배의 쓴맛을 보지만 상문고 선수들에게 포기란 없다. 상문고 주장 박상윤(18)군은 “다음에는 꼭 한 골을 넣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1학년 전정현(16) 군은 “내년에는 꼭 1승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최홍규 상문고 감독은 “우리 선수들은 진정으로 축구를 즐기는 학생들”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학생선수들에 대한 학습권 침해 문제는 심각했다. 운동을 위해 공부는 뒷전이었다. 2008년 국내 주요 언론에 보도된 학생선수들의 평균 석차 백분율을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중학교 때 석차 백분율 성적은 100명 중 79등이다. 고등학교 수업은 더 따라가기 힘들었다. 고등학교 학생선수들의 평균 석차는 82등. 학생선수는 공부는 포기하고 ‘운동기계’로 길러졌다. 더욱 더 운동에 목맬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창섭(55) 충남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선수들에게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이미 10년 전부터 체육계 사람들이 ‘머리로’ 이해한 내용이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 때문에 쉽지 않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학생선수들은 공부로 ‘좋은 대학’에 갈 실력이 안 된다.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렇기에 각자 종목에서 전국대회 입상이 필요하다. 선수와 학교, 학부형은 “운동할 시간도 부족한데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나. 전국대회에서 성적을 내 좋은 대학 가는 게 우선이다”라는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운동 말고는 다른 길이 없기에 성적 지상주의가 자리 잡았다.

성적 지상주의에 따른 부작용도 종종 사회문제가 돼 수면 위로 드러났다. 심판 매수부터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뇌물 수수까지 부정부패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례행사였다.

이런 현실 때문에 ‘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늘었다. 한국에서 운동선수를 하기는 힘들다는 인식이 심어졌다. 자연히 엘리트 체육을 하는 학생선수 수도 줄었다. 2006년 8만2141명이던 학생선수는 2년 사이에 8만1008명으로 줄었다.

이창섭 교수는 “한국도 이제 선진국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학원체육도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서 선수를 만들어야 한다. 선수를 운동기계로 만들어 당장의 성과가 좋았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단순 논리로 수많은 학생들을 희생시킬 일이 아니다. 이제 과정도 중시하고 거시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11월 국회는 ‘학원체육 정상화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 12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학생선수 학습권 보장을 위한 최저학력제도’ 도입을 권고했다. 가장 먼저 변화를 시도한 종목은 가장 많은 학생선수가 있는 축구다. 대한축구협회는 2008년 11월 초·중·고등학교 리그대회 전환 사업을 발표했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과학기술부가 손잡고 ‘선진형 학교 운동부 운영 시스템’을 추진했다. 이 시스템은 ‘공부하는 학생선수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국 12개 초·중·고등학교의 운동부를 선정해 시험 운영하고 있다. 서울·경기·충남의 9개 학교는 축구부가, 부산 지역 3개 학교는 농구부가 이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는다.

상문고는 선정된 12개 학교 중 유일하게 운동부가 없던 학교다.

상문고는 올해 초 일반 학생을 뽑아 축구부를 새로 만들었다. 최홍규 상문고 체육부장은 “처음 축구부 만들고 선수를 뽑는데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 반에서 공 좀 찬다는 친구들을 다 지원했다”고 기억했다. 한 학년에서 50명이 넘는 학생이 지원했다. 이들을 추리고 추려 30명의 학생이 상문고 축구부 창단 멤버로 뽑혔다. 상문고는 아시아축구연맹(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소지한 김응규(41) 코치를 데려와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축구를 가르쳤다.

시행착오는 있었다. 최홍규 부장은 “초창기 격차를 빠르게 줄이자는 생각에 운동을 많이 시켰다. 그게 실수였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만 하던 학생들은 힘든 훈련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학구열이 높은 ‘강남 8학군’에 위치하다보니 운동에 반대하는 학부모가 많았다. 최홍규 부장은 “학생은 너무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의사인 아버지가 극구 반대해 뛰지 못하는 친구도 있다”며 아쉬워했다. 밥만 먹고 축구를 한 엘리트 학생선수들과는 정반대인 상황이다.

이제 정말 축구를 즐기는 18명이 남아 상문고 축구팀을 이끌고 있다. 최홍규 부장은 “지금 꾸준하게 나오는 애들은 축구가 좋아서 남아 있는 것이다. 여름방학에도 매일 모여 훈련했다. 방학을 반납하고 기량을 끌어 올렸다”며 흐뭇해했다.

주장 박상윤(18)군은 ‘고3’이다. 박군은 “훈련은 힘들지만 축구가 즐겁다. 수능이 70여 일 남았지만 팀과 함께 끝까지 할 것”이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상문고 축구부 분위기는 밝다. 모두 축구가 좋아서 모인 학생들이기 때문에 무서운 호통과 얼차려는 있을 수 없다. 함께 공을 차며 훈련을 즐긴다. 다른 학교 운동부에는 일상인 합숙은 없다. 상문고 축구부 선수들은 수업에 100% 참석한다. 훈련은 수업이 끝나고 매일 한 시간씩 한다.

밝은 분위기와 합숙이 없다는 소문에 다른 학교에서 엘리트 학생선수도 전학 왔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 골키퍼였다는 전정호(17)군은 “전에 있던 학교에서는 운동부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었다. 운동부를 나와 방황을 많이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상문고로 전학을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상문고는 분위기가 차분해 좋다”며 웃었다.

상문고 선수들과 엘리트 학생선수 간에는 큰 벽이 있다. 전철과 사람의 달리기 차이보다 크다. 상문고는 경기할 때 수비하는 데 급급하다. 보통 반코트 게임이 전개된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중학교 때 시작한 친구들은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 하지
만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격차를 좁히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트 학생선수 출신인 김응규 코치도 “내가 코치로 오기도 전에 올해 대회 참가 신청서를 내
놨더라. 이건 막 모인 오합지졸로 해병대를 상대하는 꼴이었다. 다른 팀 감독들도 왜
나왔느냐고 묻더라”며 웃었다. 이어 “처음 선수들을 봤을 때는 앞이 깜깜했다”고
털어놨다.

상문고가 속해 있는 2010전국고교리그 서울 동부 권역에는 언남고와 보인고·중동고·배재고 등 축구 명문학교가 버티고 있다. 다른 학교 관계자는 “상문고는 전력이 너무 약하다. 리그를 거쳐 3위 안에 들어야 플레이오프에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골을 넣지 않으면 나중에 골득실에서 밀릴까봐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전반기 15경기 동안 상문고 골문을 지킨 김현성(18)군은 200골 넘게 내줬다. 하지만 막아낸 공도 많았다. 최홍규 부장은 “현성이가 하도 많이 막다 보니 손목에 관절염까지 생겼다”고 전했다.

김응규 코치는 “선수들이 열정적으로 해주기 때문에 점점 좋아지고 있다. 지금은 실력이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주장 박상윤군도 “우리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보인다. 끝까지 멋진 승부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6일 상문고 축구선수들의 1학기 성적이 공개됐다. 상문고 선수 대부분의 성적이 올랐다. 엘리트 학생선수였던 전정호군의 성적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상문고로 옮겨와 공부를 시작했다. 6월 모의고사에서 2학년 547명 중 186등까지 뛰어올랐다. 전군은 “전학하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거의 전교 꼴찌였다. 시험을 안 보기도 했다. 다른 과목은 어느 정도 따라가겠는데 영어·수학은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다”며 엄살을 피웠다.

최홍규 부장은 “전에 봤던 시험보다 석차가 떨어지면 경기에 뛸 수 없다는 자체 조항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선수들이 공부도 열심히 한다”며 제자들의 성적표를 보고 자랑스러워했다.

3학년인 주장 박상윤군은 “운동하면서 공부를 못했다는 생각에 더욱 집중해서 하고 있다. 성적도 2학년 때 200등대에서 110등까지 올랐다”며 “꿈이 스포츠 마케팅 쪽으로 가는 것이다. 성적이 올라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입학사정관제 등 여러 길을 함께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상문고 축구부에서 주장으로 뛰었던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7월 남아공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 홍보 활동을 해 화제가 됐던 송재근(17)군도 상문고 축구선수다. 그는 “스포츠 에이전트가 꿈이다. 선수로 직접 뛰어보니 그 고충을 알 것 같다”며 “내가 그리고 있는 미래의 꿈에 큰 자산이 된다”고 말했다. 송군은 성적도 올랐다며 미소를 지었다. 2학년 첫 학력평가에서 전교 87등이었는데 6월 모의고사에서는 40등까지 뛰어올랐다.

교과부는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 공부하는 ‘학생선수들’을 우선적으로 뽑아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최홍규 부장은 “입학사정관제가 시작되면서 이런 과외 활동이 중요해졌다. 상문고 축구선수도 대학 진학이 잘돼야 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운동선수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사례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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