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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 그리고 아름다운 귀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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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상은 결코 쉽지 않았다. 넘어져서 간신히 일어나면, 이번엔 또 자빠지고, 엎어지고…. 하지만 그들은 끝내 일어섰다. 나라 살림이 피어날 조짐을 보인다지만 아직까지 시린 날을 보내야 하는 한숨 소리가 곳곳에 들리는 요즈음. 아직 박수를 받기엔 이를지 모른다. 고향이 얼마 만인지 설을 맞으러 향하는 그들의 발길이 아름답다.

*** 신용불량자 탈출 배장식씨

카드 돌려막다 노숙 "취업할 자신감 있어"

▶ 모처럼 잡은 아내의 손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 아들녀석도 무슨 신바람이 났는지 저만치 달려간다. "사형선고"같던 신용불량자 신세를 벗고 처음 맞는 설. 마음은 벌써 고향집 앞마당이다. 배장식씨 가족이 6일 귀향에 앞서 오랜만에 마련한 한복을 입고 충북 진천의 농다리로 나들이를 나섰다.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여보, 나 어때? " "마-, 새색시 같다."

6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허름한 연립주택. 1남1녀의 아빠이자 가장인 배장식(44)씨는 설을 맞아 모처럼 마련한 한복을 꺼내들고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아내의 호들갑(?)에 덩달아 맞장구친다. 2년여 동안 옥죄었던 '신용불량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상인'으로서 맞는 첫 설-.

올해처럼 설맞이로 가슴을 설렌 적은 없었다. 하지만 순간 지난 세월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 이내 코를 훌쩍였다. 경기도 용인의 건설회사에 다니던 배씨의 삶이 수렁으로 빠져든 건 1998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부터.

독학으로 계명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대구의 제약회사와 화학회사를 거쳐 92년부터 기대던 벽이 무너진 것이다. 월 200만원가량 되던 수입은 날아갔고 새 직장은 구할 수 없었다. 당장 식구들 끼니가 궁하게 됐다. 카드돌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2002년엔 카드로 빌린 4000만원으로 친구와 함께 강원도 홍천에 차렸던 포장마차가 장사 시작 이틀 만에 장마에 쓸려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빚만 있는 신용카드 7장뿐. 죽고만 싶은 생각에 술을 양식 삼아 노숙했다. 4개월 만에 친구에게 들켜 가족한테 돌아왔을 땐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신용불량자가 돼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데다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숟가락조차 숨겨야 하는 처지-. 몇 번이나 유서를 썼는지 모른다. 그에게 한 가닥 햇살이 비친 건 지난해 신용불량자를 구제하는 '한마음 금융'이 생기면서. 그해 7월 한마음 금융과 카드빚 2800만원을 8년간 월 28만원씩 나눠 갚기로 했다. 마침내 '정상인'. 세상이 달라 보였다. 다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신이 났다. 아직 막노동으로 월 100만원 정도 벌지만 공장에 다니는 아내 덕에 생활은 구색을 갖췄다.

"얼마 전엔 전문대에 합격한 딸(19)에게 20만원짜리 정장을 사주기도 했어요. 곧 본격적으로 취업에 도전할 겁니다. 자신있습니다."

배씨는 설날 어머니가 계시는 대구에서 차례를 올린 뒤 10년 만에 태어난 고향인 경북 고령에도 들를 참이다.

글=이만훈 기자, 취재=서경호.박혜민.김준술 기자<mhl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부도 위기 극복한 최영택씨

아이들 통장도 압류 "올해는 반드시 도약"

▶ "아버지-. 못난 아들 땀시 그동안 심려가 많으셨지라. 곧 희망 가뜩 싣고 달려갈랍니다." 전남 완도의 고향집을 찾아 떠나는 중소기업 사장 최영택씨.

경기도 성남에서 '창작디자인연구소'를 운영하는 최영택(43)씨는 지난해 설 새벽 거리를 헤맸다.

87년부터 연 매출 5억원 규모의 차량 도색 공장을 운영해 오던 최씨에게 시련이 닥친 건 2002년 말. 직원이 작업 중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뇌를 다친 게 발단이었다.

산재보험에 들지 않아 치료비를 모두 물어줘야 했다. 급한 김에 월 9부짜리 사채 4000만원을 얻어 썼다.

직원 7명과 함께 그런 대로 꾸려왔던 회사는 갑자기 휘청대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 2월 공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빚만 1억5000만원. "벌어서 갚으면 될 거 아냐."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차량 디자인을 개발해 도색 업체에 공급해 주고, 업체끼리 협업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구축해 주면 돈이 될 것 같았다. 나중(?)을 위해 아내도 모르게 숨겨뒀던 돈에다 여기저기에서 빌려 1억원가량을 마련했다. 디자이너와 IT 기술자를 뽑아 회사를 차렸다. 전국을 발로 뛰어 10여개 업체를 끌어들이고 경기신용보증기금 등에서 4500만원의 운영자금을 대출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돈은 단 20일 만에 빚잔치로 넘어갔다. 자금이 필요했다. 아이들 명의의 적금, 칠순 부모님의 쌈짓돈, 결국엔 17만원이 든 애들 급식통장까지 압류당했다. 2003년 말 그래도 인터넷 사이트 구축에 매달렸다. 2004년 사이트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에서 차량 디자인과 도색공사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얘들 학비며 생계는 아내가 허드렛일로 챙겼다. 지난해 추석 땐 2년 만에 아내에게 50만원을 줬다. 그 돈으로 8개월간 막혔던 전화를 다시 뚫었다.

"올해는 반드시 도약할 겁니다."

"45세까지 고생을 끝내고 앞으로30년의 인생기반을 다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2년 남았습니다." 올해는 아버지의 팔순. 완도 고향집에 가는 발길이 가볍다.

*** 취직 100전 101기 서은선씨

대학원 나와도 허사 "5년만에 어깨 펴요"

▶ 100여 차례 도전 끝에 마침내 취업에 성공한 서은선씨가 당당한 걸음으로 가족이 있는 광주행 기차에 올랐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기보다 더 어려운 게 뭔지 아세요? 바로 취업이란 거예요."

스포츠 의류 전문회사인 FnC코오롱에 다니고 있는 서은선(29.여)씨는 요즘 직장에서 선배들한테 혼이 나는 것조차 즐겁다. 100차례나 넘게 미끄러진 끝에 얻은 '꿈의 자리'가 아닌가. 2000년 전남대 미대를 나온 그가 취업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2003년부터. 신문과 인터넷을 뒤져 디자이너를 뽑는 데면 원서를 냈다. 자신의 작품을 들고 무작정 패션 회사를 찾아간 것도 부지기수다. 대학 졸업 후 1년의 준비를 거쳐 2002년 이대 대학원 의상디자인학과에 들어간 것도, 2003년 적금을 깨 개인전을 연 것도 사실 조금은 취업에 보탬이 될까해서였다. 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대학원을 다니다 보니 대기업에선 나이가 많다고 하고, 중소기업에선 학력이 너무 높다고 하고…."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하던가. 지난해 여름 기회가 찾아왔다. 한 방송의 취업프로그램을 통해 FnC코오롱에서 디자이너를 공개 모집했다. 그 지긋지긋한 나이 제한도 없었다. 전국에서 1200명이나 몰렸지만 3차의 테스트를 거쳐 용케도(?) 최종 후보 10명에 선정됐다.

이어 방송을 통한 공개 경쟁에서 마지막 7명 안에 들어 합격했다. 올림픽 기간 중 이 프로를 본 아버지가 마치 금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축하 전화를 해주는 통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취업은 바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지난해 10월 정식 입사해 상품기획을 맡고 있는 서씨는 "대학 졸업 후 5년 만에 모처럼 어깨를 펴고 고향인 광주에 가게 됐다"며 "3년간 사귄 남자 친구와 가을께 결혼도 할 계획"이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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