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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공무원이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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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 과정에서 목격한 가장 서글픈 현실은 행시 개혁안의 좌초 같은 게 아니었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이 여전히 ‘공무원=벼슬아치(관리)’ ‘고시 합격=입신출세’라는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본 것이다. 얼마 전 낙마한 국무총리 후보자가 도청 직원을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쓰고, 부인이 관용차를 타고 다녔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젊은 나이에 도지사가 되고, 청년출세를 해서 철이 없었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 요즘 사태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도 지배권력층으로 신분이 올랐다는 생각에 아무 가책 없이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었을까. 그런 특권의식 때문에 공무원이 되는 고시에 10만여 명의 유능한 젊은이가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고시제도, 정말 문제가 많다는 걸 말이다. 고시 출신들의 ‘패거리문화’ 같은 건 차치하고, 우선 유능한 젊은이들이 고시 후엔 다시 쳐다보지도 않을 것들을 암기하며 청춘을 바치는 게 아깝다. 한 기업인은 우리 경쟁력을 갉아먹는 가장 큰 병폐로 고시를 꼽았다. “머리 좋은 고시생 반의 반만이라도 산업현장에 젊음을 바치거나 창업에 나선다면 한국의 기업 경쟁력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20년 전쯤 미국 일리노이주 노동장관에 막 부임했던 전신애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주정부 공무원을 거쳐 장관이 됐다고 했다. 공무원이 된 과정은 단순했다.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함께 권익운동을 하면서 주정부에 정책을 건의했더니 정부에서 “당신들의 문제를 잘 아니 정부에 들어와 관련된 일을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직이란 그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봉사정신으로 하면 족한 일이다. 공무원이 그렇게 어려운 시험을 거쳐야 할 일도, 청춘을 바칠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분 상승의 야심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을 보상하는 자리가 돼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공무원을 어떻게 뽑느냐가 아니라 공무원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공무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부터 다시 정의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시대 공무원은 과거 신분사회의 정점에 있었던 벼슬아치의 다른 말이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신분제도가 타파된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양선희 week&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