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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여론재판, 오프라인 고소·고발로 ‘역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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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 7월 28일 서울남부지검에는 EBS 국어강사 장희민(38)씨에 대한 진정이 접수됐다. “장희민씨가 군의 명예를 훼손했으니 수사해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씨는 같은 달 24일 EBS 강의 도중 “군에 가서 사람 죽이는 것 배워 온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이 사건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논란거리가 되자 전원책 변호사 팬카페 회원들이 대검찰청과 국방부에 민원을 넣은 것이다. 대검으로부터 진정을 내려받은 남부지검은 지난달 말 장씨를 무혐의 처리했다고 15일 밝혔다. 남부지검 관계자는 “군(軍)이라는 대상이 특정되지 않아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네티즌의 여론재판이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에 비난 댓글을 다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가기관에 진정하거나 형사 고소를 하는 적극적인 형태로 변한 것이다. 올여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건들은 현재 대부분 수사기관으로 넘어갔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는 방송인 신정환(35)씨의 필리핀 불법 해외 원정도박 의혹을, 형사5부는 가수 타블로의 학력위조 의혹을 수사 중이다. 국세청은 현재 ‘4억 명품녀’로 알려진 김모(24)씨의 불법증여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이들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네티즌의 여론 형성→네티즌과 일반 시민의 진정·고발→국가기관의 조사 및 수사 착수란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가수 타블로의 학력 의혹 규명에 검찰이 직접 나선 것은 대검찰청 전자민원 사이트에 네티즌이 집단으로 민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신정환씨에 대한 서울 중앙지검의 수사는 인천에 거주하는 한 시민의 고발로 시작됐다. 앞서 네티즌들의 처벌 여론이 거셌다.

국세청이 ‘4억 명품녀’에 대해 세금 포탈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도 국세청 홈페이지에 네티즌 민원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신상 털기’에서 실제 고발로= 사회적 논란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네티즌의 주무기는 ‘신상 털기’였다. 2005년 지하철 ‘개똥녀’ 사건, 지난해 ‘루저녀’ 사건이 대표적이다. 네티즌들은 당사자의 얼굴, 출신 학교, 가족관계 등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표적이 된 사람은 사생활이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하지만 이런 관심은 대개 냄비처럼 끓었다가 곧 잊히곤 했다.

반면 최근에는 온라인상의 논란이 오프라인의 고발과 수사로 이어지고 있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사회 정의에 대한 네티즌의 감수성이 예민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난과 화풀이로 그치지 않고, 사회 공론화를 거쳐 법적으로 교정하려는 움직임이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35)씨가 매니저에 의해 감금·폭행을 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 네티즌은 큰 역할을 했다. 국민 신문고에 ‘유진 박을 도와 달라’는 민원을 제기해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고소·고발이 남발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희민씨를 상대로 한 진정에 대해 남부지검의 한 검사는 “정식 수사로까지 이어질 확률이 낮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명예훼손의 법리를 따져보지 않고 접수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네티즌의 ‘인정 욕구’에서 찾았다. 곽 교수는 “평범한 비난 글로는 인터넷에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진정·고발을 하면 확신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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