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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통일과 평화와 상상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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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행사가 기획된 것은 올해 초. 이후 행사를 개최하기까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천안함 사태가 발발한 것. 전쟁 분위기로 비화되면서 더욱 그러했다고 한다. 행사는 물 건너갔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시의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전의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였다. 대통령이 통일세를 제안했다. 통일 문제를 의제화시켰다. 행사 관계자들은 환호성을 올렸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불안감이 아주 가시진 않았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느냐 싶게 화해의 분위기로 싹 바뀌었다. 북한 주민의 수해에 대한 남한의 지원이 제시되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까지 거론됐다.

통일로 가기까지 몇 번의 변화무쌍함이 더 반복될지 모른다. 급격한 변화는 심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우리의 숙명이라고 자위하는 데 그쳐선 안 될 것이다. 변화무쌍함에 이어 불현듯 닥칠지 모를 통일을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 통일에 대한 준비가 단지 제도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 점을 보여줬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상상력의 한계에 있었다. 기존의 통일 관련 토론회가 사회과학(정치학·경제학)의 독무대였다면, 이번엔 철학·인류학·국문학·역사학 등 인문학이 대거 참여한 점이 돋보였다.

인문학의 힘은 상상력이다. 현실적 이해 관계가 얽힌 주제에 대한 인문학의 목소리는 언뜻 생뚱맞게 들리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통일이란 주술에서 벗어나자”는 과감한 발언이 나왔고, “북한 출신 새터민을 우리 사회에 급증하는 다문화 가정과 같은 시각으로 보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학술회의 내내 화제였다. 통일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통일이라는 용어 그 자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교류의 끈을 놓지 않는 일이란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또 이미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에서 통일은 더 이상 ‘민족의 재결합’만은 아니라는 실질적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궁극적으로 인문학의 상상력이 지향하는 것은 평화다. 전쟁과 통일 사이에 놓인 평화의 징검다리를 넓혀 가는 일이다. 평화는 통일 이후의 최종 목표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 통일로 가는 고리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단순한 매개 그 이상으로 보인다.

학술회의를 주관한 두 기관이 사회과학-인문학 교류의 확대를 고려 중이라니 반가운 소식이다. 엄정하지만 딱딱한 사회과학의 논의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평화지대를 넓히는 인문학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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