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바둑] 프로기전 속기 전성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4일 베이징(北京)에서 제1회 일월성배 한.중수퍼대항전이 시작된다. 과거의 중.일 수퍼대항전 대신 한.중대회가 새로 열리는 것이다. 양국에서 5명씩 출전, 풀리그로 대결하는 이 대회는 그러나 제한시간이 아예 없는 초속기대회다. 처음부터 곧장 초읽기가 시작되고 1분 10회가 주어질 뿐이다.

▶ TV스튜디오에서 주로 벌어지는 속기는 10~20대 젊은 기사들의 독무대. 그렇지 않아도 수세인 노장들은 속기시대에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사진은 한국리그 복기 장면.

한국은 유창혁9단.김성룡9단.최철한9단.박영훈9단.송태곤7단 등 5명이 나섰고(이창호9단.이세돌9단은 스스로 사양했다) 중국은 선발전을 거쳐 저우허양(周鶴洋)9단.뤄시허(羅洗河)9단.왕레이(王磊)8단.후야오위(胡耀宇)7단.왕시(王檄)5단이 뽑혔다.

45세 이상의 노장기사들이 출전하는 제1회 잭필드배 시니어기전도 4일 바둑TV에서 스타트한다. 이 대회는 제한시간 10분 짜리다. 초읽기는 40초 3회.

바둑대회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빨라지고 있다. 바둑은 난가(爛柯:썩은 도끼자루)라고도 불린다. 신선들의 바둑 한판을 구경하고 났더니 도끼자루가 썩었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난가지락(爛柯之樂)이란 사자성어는 곧 바둑의 재미를 뜻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바둑은 TV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원형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현재 치러지고 있는 프로 바둑대회는 모두 26개(세계대회 10개, 국내대회 16개). 이 중 속기로 분류할 수 있는 대회는 10개다. 이 10개 중 제한시간 10분 이하의 속기가 8개이고 나머지 두개는 1시간짜리다.

속기의 흐름은 TV에 앞서 세계대회가 주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왕위전.국수전 등 유명 국내 대회가 각 4, 5시간의 소비시간을 갖고 있을 때 상금규모가 몇배나 더 큰 세계대회들이 3시간 제한시간을 채택했다.

각 4시간의 경우 점심시간과 초읽기 시간을 포함, 길게는 12시간도 간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바둑이 자정을 넘겨 끝나면서 통금이 있던 시절 대국자가 집에 가지 못하는 일도 빈번했다.

세계대회 기획자들은 TV중계와 팬을 위해 대회가 각 3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많은 기사가 세계대회가 3시간짜리 속기(?)로 이벤트처럼 치러진다는 사실을 걱정했지만 지금은 당연한 일이 됐다. 국가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와 정관장배는 1시간이다.

26개의 대회 중 속기가 10개니까 아직은 절반이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새로 생긴 한국리그, 전자랜드배 등이 모두 10분짜리 속기이고 4일 새로 시작되는 한.중대항전과 잭필드배 시니어기전도 초속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속기화 추세는 점점 더 거세질 게 분명하다. 속기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국내기전 중 KT배 왕위전은 올해 40회 대회부터 4시간의 전통을 포기하고 3시간으로 줄였다. 30여개의 아마추어대회도 각 30분을 넘기지 않고있다.

이 같은 흐름의 역작용으로 노장들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속기는 경륜이나 대세관보다 순간집중력과 짧은 시간의 계산력이 중요한데 노장들은 이 점에서 젊은 기사들에게 크게 뒤지기 때문이다.

또한 '최선을 추구한다는 바둑의 본질이 훼손되고 순간 감각이 득세하고 있다'는 주장도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본에서 각 40시간에 6개월이 걸린 슈사이(秀哉)명인과 기타니(木谷實)의 대국은 그 한판이 명작 소설로 꾸며질 정도로 바둑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지금도 메이저기전은 8시간짜리 이틀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는 속기화의 거센 물결 속에 묻히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