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90세 ‘홍콩노인’ 저우서우천에게 손을 내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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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29면

1953년 홍콩을 방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일리노를 영접하는 홍콩의 중국인 영수(香港大老) 저우서우천. 당시 92세였다. 김명호 제공

1949년 5월 중순, 중국인들이 ‘香港大老’라고 부르는 태평신사(太平紳士:홍콩총독이 임명하던 명예직. 시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97년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된 후엔 행정장관이 임명) 저우서우천(周壽臣)은 낯선 우편물을 한 통 받았다. 발신지는 옌안(延安) 푸광(複光)로 37호. 보낸 사람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열어보니 일면식도 없던 마오쩌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오른편 상단에 “수신선생혜존(壽臣先生惠存)”, 왼편 하단엔 마오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 마오는 생전에 수많은 글씨를 남겼지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또박또박 쓰고 말미에 낙관을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2>

중국인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름은 들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던 사람과 이런 방법으로 교제를 트곤 했다. 결혼을 앞둔 여인들도 붓글씨에 자신만 있으면 마오가 저우에게 보낸 것처럼 자신의 사진을 남편 될 사람에게 선물로 보냈다.

겉봉의 주소를 다시 확인한 저우는 마오가 2년 전 옌안에서 철수하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것이겠거니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신중국 선포 5개월을 앞둔 마오쩌둥이 90이 다 된 홍콩의 노인에게 먼저 손을 청했을까?

마오쩌둥은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에 머물던 시절 이 사진을 저우서우천에게 보냈다. 마오의 거처는 특급 보안사항이라 발신지를 옌안으로 하는 바람에 저우서우천을 잠시 헷갈리게 했다.

1881년 8월 청(淸)나라 정부는 9년 전부터 4년간 해마다 30명씩 미국에 파견했던 관비유학생(大淸留美幼童)들을 소환하기로 했다. ‘국고만 축내고 나라에 도움될 일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컬럼비아대에 합격한 저우서우천은 교실 문턱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귀국 보따리를 꾸렸다. 열세 살 때 뽑혀서 미국에 온 지 7년 만이었다.

유학생들은 상하이부두에 도착하는 날부터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상해신보(上海申報) 9월 29일자에 “말할 때 생글생글 웃기를 잘한다. 어른들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턱을 까딱거리는 모습은 볼수록 가관이다. 예의와 염치를 망각한 지 오래다. 방약무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오랑캐들을 교화시키기는커녕 양인들의 온갖 악습에 제대로 감염된 부류들, 사람 노릇 하기는 다 틀렸다. 뭐 하나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내용의 사론이 실린 것을 보면 당시의 대표적인 언론기관부터가 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간 서구인들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퍼붓기로 작심이라도 한 것 같았다.

스스로를 군자(君子)라고 생각하는 사대부들은 “젖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것들을 얼굴 허연 사람들이 우글대는 곳에 보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중국인들은 옛날 옛적부터 안색이 흰 남자를 악(惡)하고 천(賤)하게 여기는 습관이 있었다.

정부는 유학생들을 푸저우(福州)와 톈진(天津)에 배치했다. 과거 출신도 아니고 서양의 하잘것없는 기술만 익힌 청년들에게 변변한 일자리는 턱도 없었다. 매달 받는 돈으로는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들었다. 미국 시절 하숙집 주인 딸에게 “서양 귀신이 씌운 놈들이라며 가는 곳마다 감시를 당한다. 너무 춥고 배가 고프다. 정부는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굶거나 얼어죽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을 정도로 빈곤에 시달렸다.

톈진 쪽에 배치된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톈진이 본거지였던 직례총독 리훙장(李鴻章)은 국제적 감각을 갖춘 실무형 인물을 좋아했다. 얼치기 혁명가와 개혁가, 세상물정 모르는 삼류 논객들을 벌레 보듯이 했다. 유학생들에게 적성검사를 실시해 철도·통신·광산·세관 쪽에서 경험을 쌓게 했다.

저우서우천은 톈진 세관장 묄렌도르프 밑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외국인회사에 고용된 심부름꾼이나 청소부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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