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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젊음이 테러 당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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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그제 9일은 ‘라마단’이 끝나는 날이었고 오늘은 9·11 9주년이 되는 날이다. 라마단은 이슬람력(曆)으로 9월을 가리킨다. 이슬람력은 윤달이 없는 태음력이어서 라마단은 해마다 일정치 않다. 올해는 양력으로 환산해 8월 11일부터 9월 9일까지가 라마단이었다.

# 이슬람교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전한 신성한 달이라 해서, 라마단 기간 동안 매일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의무적으로 금식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담배, 물, 성관계 등도 금한다. 특히 라마단의 27번째 날 밤은 ‘라이라툴 카드르’ 즉 ‘권능의 밤’이라 해 밤새워 기도한다. 하지만 라마단이 끝난 다음 날부터 ‘이드 알 피트르’라는 축제가 사흘간 열려 이때만은 맘껏 먹고 즐긴다. 그런데 올해는 공교롭게도 9·11 추모일과 이슬람의 축제 ‘이드 알 피트르’가 겹쳐 버렸다. 한쪽에서는 한 달간에 걸친 절제와 금식 후의 방임과 포식을 만끽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테러의 공포가 어김없는 기념일로 다가온 것이다.

# ‘권능의 밤’이라 불리는 라마단의 27번째 날 밤 즉 ‘라이라툴 카드르’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라는 아랍연극 ‘왕은 왕이다’를 봤다. ‘아라비안 나이트’ 즉 천일야화의 내용 중 152번째 밤에 등장하는 ‘잠든 자와 깨어 있는 자’를 토대로 시리아 출신 극작가인 사아달라 완누스가 1977년 발표한 작품을 각색한 연극 ‘왕은 왕이다’는 일종의 정치적 우화다.

# 원작은 바그다드의 하룬 라시드 왕이 암행(暗行) 중 만난 거리의 주정뱅이에게 왕 노릇을 해볼 기회를 주지만 그는 왕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왕노릇이 별것 아님을 깨닫고 미련없이 거리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번에 올린 연극에서는 ‘가짜 왕’이 된 주정뱅이 ‘아부잇자’가 오히려 진짜 왕보다 더 왕 같은 위엄과 권위를 갖추고 신하들을 호령하면서 결국 ‘진짜 왕’보다 더 진짜처럼 돼 버린다는 역설과 해학이 함축돼 있다. 언뜻 보면 가짜가 진짜를 몰아낸 것 같지만 기실 권력에서는 진짜도 가짜도 따로 없고 오로지 왕관과 가운 그리고 자리와 같은 권력의 상징을 누가 갖고 거기 누가 앉느냐의 문제만 있을 따름이라는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메시지를 연극은 담고 있었다.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대사가 다름아닌 “나에게 왕관과 가운을 주시오.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리다!”였다.

# 지난 한 주 동안 우리 사회를 온통 들쑤셔놨던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의 딸 특혜 채용 논란, 아니 그 분노의 기저엔 ‘공정’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일단 머리에 뭔가를 쓰고 팔에 완장을 두르고 가운을 걸치고 어느 자리에 앉으면 그냥 그것으로 자리 굳히기와 재생산이 끊임없이 가능한 이 나라의 세태, 더 나아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정도를 넘어 자리가 자리를 만드는 이 기막힌 현실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절망’이 거기 배어 있는 것이다.

# 이슬람교도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목마름과 배고픔을 견뎌야 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강도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일다운 일에 목마르고 배고팠다. 그나마 이슬람교도들은 그 라마단이 끝난 후 ‘이드 알 피트르’를 통해 맘껏 포식하며 목마름과 배고픔을 덜겠지만 정작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여전히 일다운 일, 자리다운 자리에 목마르고 배고프다. 이런 와중에 자기 자리로 딸의 자리마저 교묘히 만든 파렴치한 권세의 작태 앞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좌절을 넘어 분노를 삼켰다. 그것은 적어도 그들에겐 9·11 테러보다도 더한 아직 채 피어보지도 못한 ‘젊은 영혼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에 다름 아니었다. 더불어 이 참에 이 땅에서 풍자와 독설의 연극이 정말 쉽지 않은 진짜 이유 중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현실의 작태가 웬만한 연극이 자아내는 독설과 풍자로는 이도 안 먹힐 만큼 치사하고 교묘하며 뻔뻔하기 때문이었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