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1% 통일기금 적립” 이젠 실천할 때 ③ 통일 이전에도 기금 쓰는 유연성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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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에 적극 참여했던 한 의사의 얘기다. “북한에 의료 시설이 극히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작은 보건소를 어렵사리 만들어 줬다. 몇 달 후 다시 방북해 이곳을 찾아보니 전기 공급이 안 돼 의료 기계가 무용지물이 됐다. 남쪽으로 내려 와서 소형 발전기를 사 들고 갔더니 얼마 후엔 발전기를 돌릴 기름이 없다고 했다. 몇 달 후엔 항생제 등 약품이 다 떨어졌다. 시설만 갖춰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는 북한과의 통일을 위한 기금은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통일기금 사용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언제, 어떻게, 어디에’ 쓸지에 대한 청사진을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언제=통일 전이라도 필요할 땐 쓴다

항구 중국 국적 화물차들이 북한 나선항 부두에서 하역을 기다리고 있다. [화보 조선]

지난해 9월 골드먼삭스는 ‘통일 한국’ 보고서에서 “남한 입장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통일 방식은 독일식 통일이며, 가장 적게 드는 방식은 중국-홍콩형”이라고 결론 냈다. 2009년 북한의 1인당 GNI는 남한의 18분의 1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같은 갑작스러운 남북 통일은 4800만 명 남한 인구가 북한의 2300만 명의 생계를 한순간에 떠안는 꼴이 된다. 그 전에 남북 간 격차가 줄어들면 통일비용은 그만큼 감소한다. 이화여대 조동호(북한학) 교수는 “통일에 앞서 북한의 경제·사회 시스템이 최소한으로라도 굴러가게 만들어야 나중에 돈이 덜 들어간다”며 “기금은 쌓기만 해선 안 되고 필요할 때 북한 경제·사회 정상화를 위해 쓰는 게 옳다”고 강조했다. 여기엔 북한의 군사적 도발 중지와 긴장 완화 노력 등의 전제가 필요하다. 국내적으론 적립된 통일기금을 국회 동의 하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투명성, 국민적 공감대를 위해서다.

진짜 목돈은 통일 직후부터 필요하다. 2007년 한국교통연구원이 추산한 북한 내 철도·도로 등 교통 현대화 비용만 91조원으로 천문학적인 규모다. 중앙대 신창민(경제학) 명예교수는 “북측지역 사회간접자본(SOC)을 위한 투자는 통일 후 어차피 해야 될 부분인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게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는 만큼 지금부터 이 부분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기금을 통일 이후가 아닌 통일 과정에서도 SOC 등 전략적 분야에 사용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 어떻게=‘물고기’보다 ‘물고기 잡는 그물’에 쓴다

철도 기술자들이 2008년 북한 나진과 러시아 하산 을 잇는 철로를 교체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전문가들은 생계비 지원과 같은 ‘소모성 단순 지원’은 통일 후 남북 격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함께 잘사는’ 장기 목표엔 역효과를 준다고 지적한다. 현대경제연구원 홍순직 수석연구위원은 “통일 후 기금 사용은 북한 주민에 대한 최저생계비 지급과 같은 직접 지원에 모두 쓰기보다는 일자리 창출 등 ‘북한 경제 살리기’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동용승 연구전문위원도 “북한 경제 재건을 통해 북한 지역에서 세금이 걷히고 이것이 재건에 투입되는 구조를 만드는 데 써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한국은행의 ‘통일 이후 남북한 경제통합 방식 연구’에서도 동독 주민에 대한 임금 보전, 사회보장 확대 등의 독일형 모델보다는 북한의 저임금·저물가 구조를 유지하며 ‘생산 기반’에 더 투입하는 ‘북한 특구형 경제통합’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공단 경기도 파주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2010년 8월 개성공단 전경. [연합뉴스]

통일 전에 북한판 5개년 경제성장계획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업 기반 사회에서 단순 경공업을 거쳐 중화학공업과 서비스업으로 방향을 잡았던 남한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북한에 더할 나위 없는 성장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현재 산업구조는 70년대의 남한과 비슷하다. 동용승 위원은 “남한의 압축 성장을 견인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북한판 발전 전략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어디에=남북 이점 최대화한 윈-윈 분야로

한국광물자원공사에 따르면 금·아연·망간·니켈·철 등 핵심 광물 20종의 북한 내 매장량의 잠재 가치는 6983조원대 다. 남한(289조원)의 24배에 이른다. 골드먼삭스의 2009년 보고서는 남북한 인구 구조를 주목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 중인 남한에 비해 북한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생산활동인구를 배출하게 된다. 남한은 15세 미만이 전체 인구의 18%로 이마저도 줄고 있는 반면 북한은 23%다(2007년 기준). 인구 증가율도 남한 0.4%에 비해 북한은 0.8%다. 전문가들은 통일 전이든 후든 남한의 ‘자본·기술’과 북한의 ‘자원·토지·노동력’이 결합하는 남북한 산업 구조 분업화가 윈-윈 방식의 길이라고 강조한다. 통일이 성공하려면 남북이 서로에게 블루오션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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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한경환·허귀식·이영종·채병건·정용수·이철재·정효식·남궁욱·전수진·천인성·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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