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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9) 2기 토벌작전 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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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 전단지들은 다양한 내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단순히 귀순과 투항을 권고하는 내용에서부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진 만화, 붙잡혀 이미 귀순한 빨치산이 자신의 동료에게 보내는 글을 실은 것 등 다양했다. 전단지는 빨치산 구성원을 분열시키는 데 한몫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6·25 전쟁이 벌어지는 모든 기간 중에는 아군과 적군이 경쟁적으로 전단을 뿌렸다.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아군 측 전단이 빨치산의 담배말이용으로 애용되자 아예 ‘담배 마는 종이’(왼쪽)라는 전단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의 열악한 위생 환경을 반영하듯 “우리는 가끔 목욕한다”는 내용의 전단(오른쪽)도 뿌렸다. [중앙포토]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중에 포로로 잡힌 빨치산과 그 주변 사람들이 털어놓은 이야기지만, 전단지의 상당수는 저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메모지나 담배를 마는 데 쓰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점에 착안해 전단지 일부를 ‘담배 마는 용’으로 만들어 뿌린 적도 있다. 전단지 중 일부는 화장지 대용과 여성의 생리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물자가 저들에게 거꾸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게 통신선이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이 끝난 뒤 마지막으로 지리산과 인접 산악 지역에 숨어 있는 빨치산 잔당(殘黨)을 소탕할 때에는 아주 이상한 모습의 아지트가 나타나 화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다름 아닌 ‘통신선 아지트’였다. 미군이 지원한 당시의 통신선은 전선 자체가 두꺼운 PVC 등으로 덮여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고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웬만한 습기에도 끄떡없이 버티는 통신선이었고, 일부는 아주 두껍기도 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작전을 벌일 때에는 각 부대를 연결하는 통신선이 지리산에 많이 깔렸다. 대개는 나중에 부대가 철수할 때 거두지만 일부는 그대로 버려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들은 이 통신선을 모아서 아지트를 만들 때 겉을 둘렀던 모양이었다. 비도 새지 않으면서 제법 튼튼해 보였던 아지트였다고 관계자들이 전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대량의 물자가 작전에 동원됐지만, 전체 토벌을 지휘하는 내 마음은 그렇게 편하지 못했다. 12월 15일까지 펼쳐진 1기 작전이 끝을 맺었음에도 빨치산의 주력 부대라고 할 만한 병력을 분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살 940명, 생포 1600여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전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주력을 잡아야 이 작전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기 작전까지 우리는 전투력이 훨씬 떨어지는 말단 부대와 빨치산을 따라다녔던 부역자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그쳤다.

빨치산 주력은 용케도 그물망 같은 수색대의 포위를 피해 지리산을 빠져나갔던 것으로 보였다. 토벌 부대는 주력으로 보이는 빨치산 부대를 여러 번 발견했다. 그리고 열심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빨치산 주력 부대는 늘 눈앞에서 없어지기 일쑤였다.

그들은 얼음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숨기도 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얼음 속에서 끈질기게 토벌대가 물러가기를 기다렸고, 토벌대의 취약 지역을 알아내 그 틈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토벌대는 지리산의 전역을 샅샅이 뒤져 빨치산들이 기거했던 대부분의 아지트를 없앴지만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저들을 사살하거나 잡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토벌대는 나름대로 길도 나 있지 않은 지리산 숲을 헤치면서 작전을 전개했지만 1개 연대의 작전 정면이 15~30㎞에 달하는 등 범위가 넓어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적을 붙잡지 못했던 것이다.

1기 작전이 막을 내리면서 우리가 내린 판단은 적의 주력들이 대부분 지리산을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작전을 시작하면서 그 점을 예상했다. 또한 그들의 탈주로를 미리 상정한 뒤 대비까지 했다. 김점곤 참모장은 지리산 남쪽의 백운산, 북쪽의 덕유산과 운장산, 북동쪽의 가야산 등 3개 방면으로 적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북쪽 도주로에 적이 몰릴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미리 부대를 배치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빨치산은 그를 피해서 도망갔다. 토벌 부대 사이의 지경선(地境線)을 용케도 알아낸 뒤 그 틈으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부대와 부대 사이의 경계 지역에는 자연스레 적지 않은 틈이 생긴다. 서로 책임을 미루는 일이 자주 발생해 골치를 앓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령부는 부대를 중복적으로 배치해 적이 그 틈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빨치산은 약점을 잘 찾아냈던 모양이다. 산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생활하며 전투를 벌였던 노련한 경험으로 그들은 토벌대의 약점을 간파해 도주로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사령부 또한 복안(腹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제2기 작전을 구상해 놓았던 것이다.

보름 기간 동안 지리산을 누볐던 토벌대를 산 아래로 불러 들였다. 능선과 깊은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 수색과 토벌을 반복했던 부대원들에게 잠시 쉴 틈도 주지는 못해 미안했지만 2기 작전을 발 빠르게 펼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15일 순천에, 26연대는 구례구에, 1연대는 구례에 각각 집결했다. 지리산 북면을 담당했던 8사단도 15일 16연대를 남원에, 21연대를 동면에, 10연대를 함양에 모이도록 했다. 상당히 지친 모습의 장병이었지만 빨치산을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치기 위해서는 다시 출동해야 했다. 이들은 지리산 주변의 주요 산악지역으로 다시 이동했다.

빨치산은 지리산에서 흩어졌다가 주변의 다른 산악에 모여들고 있었다. 지리산 외곽에서 예전부터 활동 중이었던 소규모 부대들에 합류해 전열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모였다가 다시 신속하게 흩어지고,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다시 합쳐지는 게릴라 특유의 전법 그대로였다. 그들은 그 점에 충실했다. 지리산에서 우리 토벌대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던 전남과 전북 도당 빨치산이 다음 2기 작전의 주적(主敵)이었다. 우리는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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