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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그림자’ 왕후닝, 정책 조율하는 실세 중 실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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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수립되나.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해 왔지만 굵직한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시스템은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왔다. 공산당과 국무원, 전인대(全人大:국회 격), 정협(政協:통일전선 조직)은 물론 중앙·지방정부 간의 역할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통치 스타일도 한몫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장쩌민 시대가 제각각이었고 후진타오 국가주석 역시 독특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아닌 후 주석은 신중한 언행과 정책 결정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본인의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장쩌민 전 국가주석 밑에서 10여 년간 2인자 생활을 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후 주석으로선 수많은 정적의 견제와 공격을 이겨낸 힘이 오늘날 ‘거대 중국’을 관리하는 비결이 된 셈이다.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중국 지도부에서 경제 분야의 책임자는 원자바오 총리다. 하지만 국가적 이슈로 떠오른 경제 현안에 대해선 후 주석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9명)이 개입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13억 인구의 민생 문제를 총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중앙정부는 무엇보다 경제정책의 효율성을 우선시한다. 그러기 위해 정보 수집단계부터 다양한 정보 채널을 활용하고 끊임없이 현장 조사·연구를 실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서의 교차 조사·토론·회의가 반복적으로 지속된다. 중요한 정책은 원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최종 결정된다. 부총리급 10여 명이 참석한 이 회의는 매주 열린다.

국가 차원의 중요한 경제안건은 당 지도부와 경제분야 장관들이 참석하는 ‘당 중앙재경소조’에서 심의 결정된다. 경제 문제를 총괄하는 당 정치국 위원들의 심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당 고위층 인사들도 현장 조사와 집단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후 주석과 원 총리도 현장에 직접 가서 민생을 살피고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불러 정치국 집단학습을 받는다. 이 자리에 초청 받은 적이 있는 한 전문가는 “강의 전 후 주석이 직접 차를 대접하고 70여 명의 지도자가 두 시간에 걸쳐 진지하게 듣는다”고 말했다. 집단학습을 통해 이견을 해소한 뒤 정책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중국의 경제정책 결정시스템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 중 하나는 누가 정책을 제안하고, 어떻게 의견을 수렴해 하부기관에 하달하느냐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정부는 농촌 가전 소비를 촉진하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중국 정부의 정책 결정과정을 잘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007년 가전제품의 공급과잉과 도·농 간의 소비 격차가 심각하다는 보고가 여러 행정 채널을 통해 상무부에 접수된다. 비슷한 내용의 보고는 공산당 라인을 통해서도 올라온다. 보시라이 당시 상무부장은 곧바로 시행 가능한 정책을 지시하고 재정부와 협의를 한다. 재정부의 자금지원이 필요해서다. 상무부와 재정부는 각각 현장 조사·연구를 거쳐 공동으로 국무원 상무회의에 농촌가전 보급정책을 상정했다. 여기에서 중앙정책으로 채택되자 중앙정부는 지방에 문건을 하달한다. 지방정부는 문건에 따라 정책 집행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를 중앙정부와 공산당 라인에 보고한다. 두 개의 라인은 재차 현장 조사를 실시해 정책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국무원 상무회의에 상정해 ‘수정정책’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당 중앙정책연구실은 사례별 조사와 각종 보고서를 분석한다. 베이징의 경제전문가들은 “전국의 중요한 당 문건과 정책 보고서들은 이곳으로 수집된다”며 “중요한 사항은 왕후닝(王<6CAA>寧·55) 주임이 직접 후 주석과 원 총리에게 보고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전한다. 후 주석의 최고 브레인 역할을 하는 왕 주임은 2007년부터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를 겸임하고 있다. 중앙서기처 서기는 당 정치국 위원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다. 그는 최근 후 주석의 해외 방문이나 농촌 시찰 등에도 그림자처럼 수행해 실세 중의 실세로 손꼽힌다. 학자 출신인 그는 후 주석이 내세운 ‘조화사회론’ ‘과학발전관’의 이론적 틀을 주도했다고 한다.

경제분야의 또 다른 브레인은 원 총리를 보좌하는 셰푸잔(謝伏瞻·56) 국무원연구실 주임이다. 셰 주임은 총리의 지시를 받아 정책 시행의 타당성과 현장 조사, 정책문건 작성 등 실무를 총지휘한다. 리커창 부총리 등 경제분야 장관들은 지역을 나누어 현장 조사를 실시하면서 지방정부로부터 관련 정책의 문제점을 직접 듣는 한편 국무원연구실에 이를 검토하도록 지시한다. 이때부터 톈쉐빈(田學斌), 황서우훙(<9EC4>守宏), 닝지저(寧吉喆) 부주임 등이 바빠진다.

산둥·허난·칭다오 등 3省·1市서 시범 실시
중국은 큰 정책을 한 번에 밀어붙이지 않는다. 반드시 몇몇 시범지역을 선정해 정책 효과를 시험해 본 뒤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점(點)에서 선(線), 선에서 면(面)으로 확대된 것을 떠올리면 된다. 가전하향 정책도 ‘3개 성(山東·河南·四川)+1개 시(<9752>島)’에서 실시한 다음 10개 성·시를 추가했다. 그러고 나서야 전국 확대 실시를 결정했다. 이런 과정은 모두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결정된다.

중앙정부가 새 정책을 처음 시도할 때는 결코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다. 먼저 상무부 문건으로 지방정부의 의향을 묻는다. 가전하향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각 성에 의향을 타진했을 때 산둥성과 칭다오시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농민이 가전제품을 사면 정부가 판매가격의 13%를 보조한다는 내용이었다. 칭다오에는 중국 최대의 가전업체인 하이얼전자와 하이신전자의 본사가 있고 산둥성은 가전제품 재고가 넘쳐 고민하고 있었다. 지원 대상 품목은 처음엔 3대 가전(컬러TV·냉장고·휴대전화)으로 제한했다. 가격도 컬러TV 1500위안(약 27만원), 냉장고 2000위안, 휴대전화 1000위안 이하의 중저가 제품만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농촌의 구매 욕구가 커지자 제품 가격과 품목을 상향 조정했다. TV는 7000위안, 냉장고는 4000위안까지 확대되고 최신 휴대전화, 오토바이, 에어컨, 온수기 등 10개 품목을 지원 대상으로 정했다. 보조금의 80%는 중앙정부, 20%는 지방정부가 냈다. 판매·유통과 애프터서비스, 보조금 지원 수속 등 복잡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만 3450만 대가 팔렸다.

중국 통계국은 “농촌 주민의 1위안 소비는 국민경제에 2위안의 소비 진작 효과를 낳고 농촌에서 가전 소비가 1%포인트 늘어나는 것은 238만 대의 소비 증대 효과가 있다”고 분석한다. 요컨대 가전하향 정책으로 농촌 가전 소비액이 매년 1500억 위안(약 27조원)쯤 늘어난다는 것이다. 2007년 12월부터 2013년까지 5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가전하향 정책의 대상이 되는 4대 가전(컬러TV·세탁기·냉장고·휴대전화)의 판매량은 약 5억 대로 예상된다.

국무원은 가전하향 정책의 성공에 고무돼 도시 지역의 낡은 가전제품을 교체하기 위한 ‘이구환신(以舊換新)’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도시 가전 소비정책의 효과는 농촌보다 훨씬 클 것으로 기대된다. 정책 추진에도 국가발전개혁위·재정부·상무부·공업신식부·환경보호부 등 5개 부서가 나섰다. 지난해부터 베이징·상하이·톈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9개 성·시(3억7000만 명)에서 시범 실시하고 있는데 올 상반기에만 가전 1500만 대가 팔렸다. 이구환신 정책에는 국내외 업체 모두 입찰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내수 확대를 위해 4조 위안의 경기부양책, 10대 산업진흥정책, 도시화, 녹색경제 등 굵직굵직한 정책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중국의 투자·소비는 정책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중국 내수시장을 뚫기 위해서는 중국의 정책 결정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중국의 향후 정책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기업만이 중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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