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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르포] 행정 공백 … 자치회가 방범·소방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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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콜록 콜록."

감기에 걸려 몸져누운 전봉희(75.가명) 할머니는 기침을 하며 괴로워했다. 아들과 딸이 있지만 모두 생활이 어려워 15년째 혼자 사는 할머니를 서너 달에 한 번 찾아올 뿐이다.

"아픈 게 제일 서러워. 보건소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 할머니는 경기도 수원에 사는 아들이 근로능력(일용직)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가끔 부쳐주는 용돈과 자치회의 무료 급식에 의존하고 있다.

구룡마을에는 개발 이익을 노리고 들어온 중산층.서민도 있다. 하지만 많은 주민은 아프고 딱한 사연을 가진 저소득층이다. 지난해부터 이곳의 대책을 고민해온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관계자는 "강남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투기꾼도 있을 수 있지만 대다수는 서울에서 갈 곳이 없는 서민.극빈층"이라고 말했다.

◆ 불법 거주 인생=정진수(72.가명) 할아버지의 주민등록상 주소는 서울 서초구 우면동의 친척집이다. 막노동을 하는 아들과 올해 중학생이 되는 손녀는 인근 개포동 주공아파트에 위장 전입해 있다. 학교를 배정받기 위해서다. 구룡마을이 주소지로 인정되지 않아 가족의 주소가 흩어져 있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거주지를 주소로 인정받은 사람은 주민 중 2%뿐이다.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1980년대 초부터 살았던 원주민이다. 나머지 98%는 다른 곳에 주소를 두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지난해 10월 '빈곤층 집단거주 지역에도 주민등록 전입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라'는 지침을 전국 지자체에 보냈다. 하지만 관할 강남구청은 지번상 사유지인 논.밭.임야를 무단 점유해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주소 등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 독거 노인도 많아=마을에는 공공시설이 전혀 없다. 그래서 자치회가 방범.소방을 스스로 해결한다. 주민 중 70%가 일용직에 종사하는 등 빈곤층이 많아 지원이 꼭 필요하지만 행정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 강남구 개포동 오혜경 사회복지사는 "혼자 구룡마을뿐 아니라 관내 경로당과 서민 가정 등을 다 돌보기에는 힘이 벅차다"고 말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전체 가정의 6%인 120가구. 혼자 사는 노인이 300여명 있지만 100여명만 혜택을 보고 있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사는 노인도 많지. 하지만 창피해 말을 하지 않아."(3대가 같이 사는 팔순 할머니)

"혼자 사는 노인이라도 주민등록상 수입이 있는 부양 의무자와 같이 사는 것으로 나옵니다. 일부는 본인이나 가족 명의로 재산이 있는 것으로 나오고요. 또 극빈층이지만 빚에 몰려 들어와 사는 사람은 신분 노출을 꺼려 수급 신청도 하지 않지요." 강남구청 관계자는 "법과 제도로는 이들을 도와주기 어렵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 왜 안 나가나="임대주택이 나와도 못 가요. 출퇴근만 3시간 걸리고, 월세도 부담이고…."

14년째 10평짜리 판잣집에 사는 박미애(57.가명)씨는 멀리 노원구에 있는 20평대 임대아파트 입주를 포기했다. 식당 주방보조 일을 하는 박씨가 일하는 곳은 강남구 포이동. 무엇보다 출퇴근이 부담스러웠다. 임대아파트 보증금 1100만원은 있지만 14만원 하는 월세도 아까운 생각이 든다.

강남구청은 일부 여력이 있는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월세 등 주거비가 적게 들고▶생계 수단이 강남에 주로 있는 데다▶개발 기대감이 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 대책은=주민들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 마을이 형성된 지 20년이 됐지만 누가.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부 조사는 한 번도 없었다. 현재로선 당장 도움이 필요한 극빈층이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길도 마땅치 않다.

한국도시연구소 이호 연구원은 "언제까지 주민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노인.유아의 건강관리 등 기초 지원부터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장기적으로는 주민에게 임대 주택을 공급하고 이주시켜야 주거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강남구청 관계자는 "행정력이 개입하면 주민들이 점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가스 점검.쓰레기 수거 등 기본적인 지원만 하고 있다"면서 "주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시간을 두고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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