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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정조에게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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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정조 관련 발언으로 나라 안이 떠들썩하다. 광화문 현판을 정조 임금의 글씨로 교체하는 일이 계기가 돼 지난해 가을의 '창덕궁 발언'까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유 청장이 창덕궁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이 정조대왕을 닮았다"고 '아부'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 청장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창덕궁 발언'의 정확한 내용은 노 대통령에게 "정조를 좀 배우십시오"라고 충고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 '정치하는 방식'에 탁월한 지혜

솔직히 나는 정조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유 청장의 그 발언이 '아부'이든 '충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역사 관련 기관의 장이 대통령에게 역사적인(?) 아부를 했다손 치더라도, 대통령 자신이 그 말을 '충고'로 받아들여 정조를 배우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는(!) 아부가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노 대통령이 정조에게서 배워보겠다면, 그래서 역사에서 난국을 헤쳐나갈 길을 한번 찾아보겠다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지혜의 요체가 '정치하는 방식'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주로 '무엇을 바꿀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참여정부를 포함해 그동안의 정권들은 끝없이 사람을 교체하고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정치하는 방식이나 개혁 방법과 관련해 정조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어느 날 정조는 신하들에게 "당나라 군대가 싸우기만 하면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시독관 이재학이 "임금의 의심"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옆에 있던 이유경은 "사람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정조는 "아무리 소인을 기용했다 하더라도 3년 동안의 전쟁에서 어떻게 한 사람도 공을 세우지 못한단 말인가"라면서, 그렇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선 임금이 사람을 기용하는 방도는 먼저 신중히 가리되, 임용한 뒤에는 의심하지 않은 연후에야 공효를 거둘 수 있다. 그런데 황제는 장수를 내보낸 뒤 환관으로 하여금 군을 감시하고 엿보게 했다. 다음으로 군사상의 일은 장군이 전적으로 주관해야 통령(統領)이 서는데 황제는 반드시 조정을 경유해 명령이 하달되도록 했다. 그 결과 장군들은 매번 사세(事勢)를 놓치곤 했다." 한마디로 장수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곽자의 같은 명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군대는 백전백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패인 분석에 비춰볼 때 정조 자신은 어떠했는가? 첫 번째 인재 기용의 방법에 있어 정조는 뛰어났다. 그는 "큰집을 짓기 위해서는 큰 재목이 필요하다"고 보고, 인재를 기르고 정승을 고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승을 임명할 때 일정 기간(8년) 한직을 전전하게 한 다음 '마음과 행적 면에서 그 실상'이 있어야만 발탁했다. 그리고 일단 임용한 다음에는 "그가 나를 저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태도로 신임하고 중용했다.

*** 방법은 알았지만 실천은 못해

그런데 두 번째의 위임하는 일에 있어서는 정조도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그는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하느라 앉아서 아침을 맞고 해가 기울도록" 바쁘게 일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관료는 책임의식을 갖지 못하고 왕의 눈치보는 데만 급급했다. "나 혼자 1000칸의 집을 지키고 있다"는 재위 말년 정조의 탄식이 그것이다. 정치를 아는 것도 어렵지만 실천하는 일은 더욱 힘들다는 것을 정조 자신이 보여줬다.

아무래도 유 청장은 '정조의 개혁 실패'를 말하기 전에 정조의 '정치하는 방식'을 먼저 말했어야 하고, 노 대통령에게 배우라고 권하기 전에 자신부터 배웠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