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View/김영철의 차 그리고 사람] 피터 폰다처럼 … 노년, 아직 달리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4면

1960년대 반항적인 청년 문화를 바탕으로 한 할리우드의 신(新)시네마 중에는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 ‘졸업(The Graduate)’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69년에 개봉한 ‘이지 라이더(Easy Rider)’는 신시네마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이지 라이더’는 주인공인 피터 폰다와 감독이자 배우인 데니스 호퍼가 개조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마디그라스를 보기 위해 뉴올리언스로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조기가 그려진 헬멧과 연료탱크, 등에 성조기가 달린 가죽점퍼를 입고 어깨 높이의 핸들 바를 팔을 벌려 잡고 동쪽으로 달리는 그들은 자유를 갈구하고 자유를 이루려 한다. 그러나 미국의 드넓은 남부를 횡단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피터 폰다는 이런 말을 남긴다.

“자유는 창녀가 되어 버렸고, 우리는 창녀의 정부(情夫)다.”

이지 라이더가 ‘창녀의 정부’를 뜻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지만 창녀가 된 자유, 그리고 창녀의 이지 라이더가 되었다는 말이 왜 그렇게도 마음에 와 닿았는지, ‘이지 라이더’는 아니더라도 피터 폰다처럼 언젠가는 나도 핸들 높은 오토바이를 타고 먼 길을 떠나 보리라 생각했었다.

두카티(DUCATI GT1000), 얼굴보다도 더 큰 바이저(얼굴 가리개)와 블루투스가 장착된 검정 헬멧, 자수로 뒤덮인 가죽점퍼, 외계인 부츠 같은 안전구두, 오토바이 전용 내비게이션 등…. 갖출 수 있는 장비는 다 준비했다.

노년에 회춘을 해보고 싶어서, ‘마초(macho)’처럼 보이려고, 아니면 도로의 망나니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지 라이더들’처럼 바이크를 타고 강원도·경상도를 돌며 나름대로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또 자유가 아직 창녀로 남아 있는지, 내 자유의 유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선 겉모습만이라도 피터 폰다처럼 차리고 싶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핸들 바를 비틀어 부르릉 엔진 소리를 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사실 두카티는 몇 년 전 장만했다. 엔진의 크기가 125㏄ 이상이라 2종 소형 면허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학원에 등록하고 15시간의 실기 교육과 한 시간의 안전 교육을 받은 뒤 시험에 합격했다. 여기저기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지만 아직 내 운전 기술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학원에서 제공한 덜컥거리는 오토바이에 올라앉아 굴절코스, S코스 위를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15시간을 채운 것이 실기 교육의 전부였던 것이다.

신호 대기 중 택배 하는 사람, 자장면·피자 배달하는 사람들과 정지선에 나란히 서서 발을 내리고 주행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은데, 그때 왠지 내 옆에서 부르릉거리는 그들이 동지처럼 느껴진다. 바퀴가 두 개 달린 비슷한 기계 위에 앉아서가 아니라 달릴 때 맞는 바람을 우리는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짐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 기사가 내 기계가 얼마짜리냐고 물어왔다. 짐 실은 그 오토바이보다 내 것이 틀림없이 많이 비쌀 것 같아서 값을 제대로 말하면 혹시 그 사람 기분이 상할까 봐 "내 오토바이가 아니어서 값을 모른다”고 둘러댄 적이 있었다. 또 엔진의 크기를 묻는 사람도 가끔 있는데 한 번은 250㏄ 정도의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엔진 크기를 묻기에 “당신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하니까, 내 연료탱크를 투박한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1000이라고 써 있는데”라고 말하곤 나를 앞질러 달려가 버렸다. ‘1000’이라고 붙어 있는 것을 보았으면 내 엔진 크기를 알았을 터인데 왜 물어보았을까…. 아직도 궁금하게 생각한다.

어쨌든, 길 떠날 준비는 다 돼 있는데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지 라이더’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를 달리고 싶다. 달리다 지치면, 해가 저무는 황야에서 불을 지펴 놓고 커피를 끓여 마시고 그리고 오토바이에 기대어 동행자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 밤을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다. 물론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어도 교통법규상 이용하지 못하겠지만 누가 휴게소에서 밤을 보내고 싶겠는가. 멀리 떠나려면 국도를 타야 하는데 풍경이 있고 청명한 바람이 부는 길이 많지 않아 주저하게 되지만 아직까지 함께 갈 동반자를 찾지 못한 것이 길을 못 떠나는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뒷자리에 앉을 모험심 있는 친구도 없고 ‘이지 라이더’에서처럼 각자 오토바이를 타고 갈 사람도 없다. 사실 봄이 되면 여름에 떠나리라 생각했고, 여름엔 장마가 끝나면, 장마가 끝났을 땐 하늘이 높을 때 선선한 바람을 타고 간다고 했다. 떠날 날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주말엔 자동차보다는 주차가 용이한 오토바이를 탄다. 택배 오토바이, 피자 오토바이들과 심리적인 경주를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자유의 존재를 찾아보기 위해 길을 떠나 보리라.

가야미디어 회장(에스콰이어·바자·모터트렌드 발행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