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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에 듣는 원형 탈모의 정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심우영 경희대 의대 교수.

▶환자의 원형 탈모 진행과정.

29일 서울 강남성모병원 의과학연구원 대강당에서는'원형 탈모증 환우모임'이라는 낯선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흔히'환우 모임'이라면 백혈병 등 심각한 질병이나 희귀병을 연상하기 쉽다. 이때문에 다소 의아해하거나 남성형 탈모(대머리)와 혼동해 "그게 질병이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형 탈모증 환자들의 고통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몸에 있는 털이란 털은 죄다 빠진지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매사에 무기력하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얼마전에는 여자친구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어요…정말 미치도록 고치고 싶네요. 완치해서 남들처럼 떳떳이 돌아다니고 싶고 꿈 많던 10대 소년의 모습을 되찾고 싶습니다."

한 20대 탈모 환자가 관련 사이트의 게시판에 남긴 경험담이다. 환우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심우영 경희대 의대 교수에 따르면 국내에서 일생동안 어떤식으로든 탈모 증상을 겪는 경우는 전 인구의 1%, 즉 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유명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원형 탈모증을 겪고 있다는 보도가 간간히 나오듯 생각보다는 흔한 질병이다. 그 중 전신탈모까지 이르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는 환자도 최대 1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병도 병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환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다.

"머리가 갑자기 빠지기 시작한 환자들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서 병원을 찾게 됩니다. 진료실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성형 탈모와는 달리 원형 탈모는 성별이나 나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30대 이하의 젊은층에서 발병하는 빈도가 높지요. 특히 중년이상 환자보다 사춘기 이전의 환자가 상대적으로 치료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외모에 민감한 젊은 환자의 경우 발병이후 대인기피나 사회관계의 단절, 무기력 등 정서적 장애까지 앓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 교수의 환자 중에는 탈모가 시작된 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해 어쩔수없이 전학을 가야했던 중학생, 휴학한 대학생, 심지어 주변의 시선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직장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풍조로 취업이나 결혼에서도 불이익을 받는다. 이때문에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도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완치되는 비율도 절반 정도에 그쳐 나머지 환자들은 평생동안 고통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원형 탈모증의 원인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흔히 스트레스를 주범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발병전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환자는 20~30% 정도에 그친다. 면역체계의 이상도 주요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기면 모낭을 우리 몸에 침투한 이물질로 인식해 백혈구가 공격, 결국 머리카락이 급격하게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 환자의 30%가량은 유전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문제는 이런 탈모증 환자가 근래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심 교수는"처음 진료를 시작한 20년전에는 심각한 탈모증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이 3년간 1~2명에 불과했는데 최근에는 연간 수십명의 환자가 찾아온다"고 밝혔다. 그는 "물론 건강과 외모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커진 탓도 있겠지만 환자의 절대수가 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용기를 북돋아 줄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왜 나만 이런 병이 생겨 고통받을까'라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이런 경우 다른 환자를 만나 대화하다보면 서로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을 겁니다. 또 환자들이 검증되지 않은 여러 속설들에 휘둘리지 않도록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제대로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목적입니다"

사회적 편견과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심 교수는"의족.의수등은 의료보험의 도움을 받고 심지어 안경도 연말정산시 혜택을 받지만 탈모환자들이 이용하는 가발은 전혀 보조가 없다"고 말했다. 이때문에 개인적으로 국세청 홈페이지 등에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의사들만의 힘만으론 부족하다"는게 그의 말이다.

현실과 거리가 있는 법제 탓에 치료를 위해 의사들이 범법자가 되는 상황도 벌어진다. 일부러 알레르기성 피부염을 일으켜 모발을 돋게 하는 '면역치료법'이 그 예다. 심 교수는 "현재 유럽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치료법이지만 여기에 쓰이는 약품이 치료용으로 쓸 수 없는 화공약품으로 분류돼 있어 국내에서 시술할 경우 엄밀히 말해 불법을 행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한피부과학회와 대한모발학회의 후원으로 열린 첫 환우 모임에는 심 교수 등 4명의 피부과 교수들과 함께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전 성균관의대 교수가 참석해 환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해 강연했다. 문의 02-958-8501.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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