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새 600년 비전’ 알고보니 ‘날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아리 뒷산에 굴을 파놓고 주물 연습을 했다.”

민홍규(56·사진) 전 4대 국새제작단장은 경찰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민씨는 어깨너머로 잡다한 기술을 익힌 ‘초등학생’ 수준의 기술자였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국새 관련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지방경찰청은 2일 ‘600년 비전(秘傳)’이라던 전통 기법은 민씨가 날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민씨가 스승으로 모셨다고 주장한 석불(石佛) 정기호 선생(1899~1989)의 다른 제자 등 주변 인물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민씨는 석불 선생에게서 실제 주물 기술을 배운 적이 없었다. 석불에게 구전받은 국새 제작 기법을 정리했다는 ‘영세부’도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민씨는 2005년 석불 선생의 수제자라며 전수한 기술을 담은 『옥새』라는 책을 펴냈다.

지난해 민씨가 유명 백화점에 전시한 40억원짜리 ‘봉황 국새’ 역시 가짜로 확인됐다. 당시 홍보 자료에 나온 것처럼 백금과 다이아몬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황동에 니켈을 입히고 인조 다이아몬드를 붙인 것이었다. 경찰은 봉황 국새의 실제 가격은 200만원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국내에는 전통 기법으로 국새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아무도 검증할 수 없는 기술인 데도 행정안전부가 민씨를 국새 제작단장으로 선정한 과정에 대해서도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민씨가 국새 제작용 금 1.2㎏(320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전날 민씨로부터 “전통기법의 국새 제작 기술은 없다”는 자백을 받은 경찰은 이날 민씨를 다시 불러 조사했다. 민씨는 경찰에 출두하면서 “여러 가지로 물의를 일으켜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민씨에게 사기와 횡령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

경찰은 또 시가 6000만원이 넘는 금 1.2㎏의 사용처를 추적 중이다. 민씨가 이 금으로 금 도장을 만들어 정·관계 인사에게 전달하거나 판매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대가 관계가 있었는지도 따져볼 계획이다. 경찰은 민씨가 전·현직 대통령에게 도장을 만들어 선물했다는 의혹과 관련, “전·현직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한 도장을 만들었다는 진술은 있지만 국새 제작에서 남은 금을 사용하지 않아 수사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한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