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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KBS는 KBS다워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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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보통 1시간10분가량이던 버스 타는 시간이 어제는 30분이나 더 걸렸다. 회사에 도착하니 온통 태풍이 화제였다. 나처럼 경기도 신도시에서 출근한 한 동료는 가로수 수백 그루가 줄줄이 나자빠진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다른 이는 집 창문 한 짝이 바람에 떨어져 나갔단다. 서울 목동에 사는 누구는 넘어진 가로수 탓에 주차장의 차를 못 빼 애먹었다고 했다. 교통체증에 시달린 정도는 애교에 속했다. 그러고 보니 전국적으로 지하철·기차가 멈춰서고 항공기 결항이 속출했다. 100만 가구가 훨씬 넘는 집들이 정전 사태로 고통을 겪었다. 강풍에 실려 날아든 기왓장, 부러진 나뭇가지에 맞아 숨지거나 감전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왔다.

어제 아침 KBS는 모처럼 ‘KBS다움’을 발휘했다. 같은 공영방송인 MBC도 새벽 5시부터 ‘태풍 곤파스 상륙’을 뉴스특보로 속속 전했지만 양과 질에서 KBS를 따르지 못했다. KBS는 태풍 상륙 전날인 그제 오후 3시 핸드볼 경기 전반전 중계방송이 끝나자마자 뉴스특보를 10분간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줄곧 태풍 피해 예방에 힘을 쏟았다. 그제 밤을 꼬박 새우며 ‘철야 뉴스특보’를 내보냈다. 어제 아침엔 ‘인간극장’ ‘아침마당’ 등 정규프로를 생략하고 태풍 소식을 전했다. 정규방송이 진행될 때는 스크롤(자막방송)을 꾸준히 내보내 국민들의 주의를 당부했다. 덕분에 어제 아침 KBS ‘뉴스광장’ 2부는 시청률 23.8%, 점유율 48.2%를 기록했다(AGB닐슨 조사). 평균 시청률이 8%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로, 역대 최고로 기록됐다고 한다. 특히 내가 KBS 화면에 눈길을 주며 한창 출근 준비에 바쁘던 오전 7시44분의 분 단위 시청률은 무려 27.9%, 점유율 50.7%였다. 이런 게 바로 KBS의 힘이요, KBS다움이다.

KBS는 방송법 75조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가 지정한 국가 재난 방송 주관사다. 사실 어제 태풍 보도도 주관사로서 할 일을 다한 것뿐이니, 제3자라면 몰라도 KBS가 낯간지럽게 자화자찬할 일은 아니다. 그동안 ‘국가기간방송’으로서의 역할보다 정치적 논란에 더 많이 휩쓸린 탓에 모처럼 제 역할 한 것이 돋보였던 것이다. 교훈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KBS가 하고 있는 국제위성방송(TV), 한민족방송·국제방송(라디오)은 돈도 안 되고 시청·청취율도 낮지만 꼭 필요한 방송이다. 소방방재청과 협약을 맺어 지난달 시작한 지상파DMB 재난경보방송도 KBS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며칠 전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한예조)이 소속 연기자에 대한 미지급 출연료 지급을 요구하며 지상파 3사와 맞붙었을 때 KBS가 가장 먼저 나서서 지급 보증을 서는 등 사태 해결의 물꼬를 텄다. 어제 SBS가 KBS의 뒤를 따랐으니 MBC만 머쓱해졌다. 이런 자세 역시 ‘KBS다운’ 것이었다.

돈도 벌고 시청률도 높이고 연예계도 주름잡고 싶겠지만, 그런 건 KBS가 주력할 일이 아니다. KBS는 ‘하고 싶은 일’ 보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도 수신료 인상 얘기가 나올 때 기꺼이 지갑을 연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