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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외교 시대에 외교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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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외교는 바로 실용의 대명사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속을 찾는 것, 미사여구를 나열하면서도 국익이 최종 목표임은 고금동서 외교의 기본 틀이다. 대통령이 의전과 체면을 따지지 않고 협상 전면에 나서 원전사업을 따오고 대통령 형제가 자원외교를 펼치는 모습, 이것이 바로 실용외교요 비즈니스 외교의 모델 아닌가. 신흥 대한민국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유치하고 의장국이 되는 기분 좋은 국력 과시 또한 실용외교의 결실이다.

그러나 자원외교, 비즈니스 외교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한반도 외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한반도 현실이 어느 때보다 위중하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와 깜짝 중국 방문으로 성지 순례를 하고 중국과 정상회담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북한이, 중국이 우리의 시계(視界)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멀어져 가고 있는가.

MB 정부의 대북 정책 핵심이 ‘비핵·개방·3000’이다. 여기에 천안함 사건까지 겹쳐 대북·대중외교가 옴짝달싹 못하는 수렁에 빠져버렸다. ‘비핵·개방·3000’은 북의 무모한 핵 개발에 대한 우리의 원론적이고도 강력한 응징 표현이다. 핵을 거두고 개방에 나서면 국민소득 3000달러를 올릴 수 있는 지원을 하겠다는 이 주장은 정책이기보다는 구호에 가깝다. 핵 개발에 모든 가치를 우선시하는 북한이 아무런 대가 없이 핵을 거둔다? 김 위원장이 상하이(上海)에서 천지개벽의 중국 개방 현실에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지만 권력 이양을 앞둔 시점에서 개혁·개방에 나선다?

외교야말로 현실이고 실용이다. 남북 간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을 한다면서 퍼주기 일변도 대북 정책이 됐고 되돌아온 것은 핵실험뿐이었다. 북과의 성벽을 쌓기만 하면 북한과 중국이 짝짜꿍이 돼 우리를 외면하고 멀어져 가는 게 한반도 현실이고 남북 문제의 어려움이다. 햇볕 정책도 안 되고 철벽 정책도 안 된다면 우리에게 제3의 선택은 없는 것인가.

이런 시점에서 대통령이 통일세 도입을 제안했다. 통일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그 비용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고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발언 며칠 후 비판이 일자 당장 신설하자는 게 아니라 논의라도 하자는 뜻이라고 발을 빼 버렸다. 발 뺄 게 아니라 논의를 더 숙성시켜야 한다. 주변 여건과 통일외교 정책은 반통일적인데 통일세를 내자고 하니 여론이 좋게 돌아갈 리 없다. 통일 정책은 안 되면 말고 식으로 해선 신뢰가 사라진다.

왜 통일세를 내야 하는가. 엄격한 의미에서 통일비용이란 통일 이전에 드는 비용이다. 통일이 오게끔, 우리가 희망하는 통일의 형태가 되게끔 통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미리 제때 제대로 쓰는 게 통일비용이다. 통일 이후는 국가 재정이 감당할 몫이다. 지난 진보정권이 자신의 생색내기 또는 자신만이 통일 지향 세력인 양 폼 잡고 생색나지 않는 돈을 썼기 때문에 퍼주기라는 거부반응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본다.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주민 돕기는 우리가 해야 할 기본 덕목이다. 신의주 일대에 엄청난 물난리가 났다면 정부와 민간단체가 복구 지원을 하겠다고 나서야 한다. 물론 금강산 피격사건과 천안함 폭침에 대해 아무런 사과 없는 북에 무슨 구호의 손길이냐고 하겠지만 우리마저 그들과 같은 수준이어서야 되겠는가. 물난리 후 쌀 지원은 필수다. 정부 일각에선 쌀 지원 얘기가 나오자마자 없던 일이라고 못을 박는다. 이런 협소한 자세로선 제3의 통일외교를 구상조차 할 수 없다. 감정은 일시적이고 국익은 먼 곳에 있다.

외교의 시대에 외교가 없다면 말이 되는가. 안보는 미국에, 수출은 중국에, 수입은 일본에 우리의 명줄을 대고 있다. 강소국은 외교와 통상, 그리고 과학기술로 먹고산다. 특히 한반도 외교에 관한 한 미국과 강한 연대를 밑바탕으로 한반도 통일에 관한 새로운 컨센서스를 중국과 협의를 통해 만들어 가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비핵·개방·3000’으로썬 제3의 새롭고 유연한 한반도 통일 전략을 짤 수 없다. 구호에서 벗어난 제3의 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의 외교 전략이 계속해 천안함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외교가 아니다.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오리를 보라. 물밑 두 발은 얼마나 분주한가. 북한과 중국이 우리의 시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외교의 두발은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전 중앙일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