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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지기’안숙선 김덕수, 크게 한판 벌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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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판소리 명창 안숙선(61)씨는 열 살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59년 전북 남원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여했다. 고깔을 쓰고 소고를 쳤다. 그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남원국악원 창설자이자 대금 명인이었던 강백천(1898~1982) 선생님이 계셨어요. 대회를 끝까지 보고 오신 후에 ‘귀신 같은 놈이 나타났다. 어린 아이가 상모를 돌리면서 설장고를 치는데 팽이처럼 돌아가 발이 안 보인다’고 혀를 내두르셨어요.”

그 ‘인간 팽이’가 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58)씨다. 이후 서로 소문만 듣고 있었던 그들이 실제로 만난 건 1970년대 초반. 20대에 갓 접어든 둘은 스승 박귀희(1921~93)명창의 집에 살다시피 했다.

판소리 ‘수궁가’로 다시 만나는 안숙선(왼쪽) 명창과 사물놀이 스타 김덕수씨. [최승식 기자]

▶김덕수=제가 사실 소리에 대해 미련이 아직도 있어요. 전공을 피리를 했지만 부전공으로 소리를 했죠.

▶안숙선=덕수가 목 구성이 있어. 장구를 하는 바람에 술도 많이 먹고 사람들이랑 어울려야 돼서, 이제 그 목이 좀 아깝게 됐지 뭐.

▶김덕수=뭐라고요. 아니, 제가 96년에 누님이랑 같이 ‘수궁가’도 했는데요. 누님이 토끼, 제가 자라 하고.

▶안숙선=맞아, 맞아. 그때 몇 달 전부터 표가 매진됐었지. 공연 날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로비에 서서 구경하고 그랬었지.

96년 당시의 공연 제목이 ‘공감(共感)’이다. 둘이 처음으로 함께 섰던 무대였다. 다음달 11일 오후 7시, 같은 제목의 공연이 경기도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다시 열린다. 함께 관객의 복을 비는 비나리로 시작해 14년 전의 ‘수궁가’를 다시 선보인다. 김덕수의 사물놀이패와 함께 ‘농부가’도 들려준다.

14년 만의 재회는 김씨의 제안과 설득으로 성사됐다.

▶안숙선=내 소리랑 시끄러운 사물놀이랑 어떻게 어울리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지. 사실 나는 우리 본연의 것만 공부하는 데도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이런 건 안 하려고 했어.

▶김덕수=앞으로는 우리 전통 음악도 이렇게 자꾸 새로운 걸 해야 된다, 100년 전 음악도 사실은 지금이랑 완전히 다르지 않느냐, 하면서 제가 누님을 설득했어요.

▶안숙선=덕수는 음악과 일을 떠나면 살 수 없는 사람이지. 나는 그걸 좀 말리는 역할만 해주면 돼. (웃음)

두 명인은 어느덧 40년 지기가 됐다. 동생은 누님에게 새로운 것을 권하고, 누님은 동생의 혈기를 다스린다. 안 명창이 “덕수는 국악계의 큰 일꾼이지. 그런데 가끔 옆을 못 보고 달릴 때가 있어서 내가 ‘누가 이런 얘기를 너한테 해주겠냐’라면서 불러 타이를 때가 많지”라고 하자 이에 김씨가 “누님도 어릴 때는 명장고였어요. 그래서 악기 하는 사람들에게 애틋함이 많아죠. 우리는 쳐다보기만 해도 어떻게 노래할지 아는 사이죠”라며 각별한 애정을 자랑했다.

그들은 98년 평양 공연에도 함께 갔었다. 안 명창이 ‘춘향가’를 부를 때 북을 잡았던 김씨는 “평양에 많은 사람이 갈 수 없어 제가 할 수 없이 북까지 쳤어요. 그때 어찌나 긴장되던지 옷이 땀 범벅이 됐죠”라고 했다. 당시 안 명창은 소리를 하다 말고 “북 잘 친다”라며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피만 안 나눈 오누이”(김덕수)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오누이’는 올 5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개막식에서 홀로그램을 곁들인 3D무대에 함께 서기도 했다. 명장고였던 명창과 목이 좋은 장구재비, 그들은 이렇게 전통과 혁신의 국악계를 끌어가고 있다. 031-960-9722.

글=김호정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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