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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언젠간 다인종 사회, 포용의 정신 키워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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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12면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은 한국말을 하지 못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깊었다. 퇴임을 눈앞에 둔 와중에도 조국의 신문사란 말에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다. [토미 리 제공]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증기선 갤릭호가 들어섰다. 전년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 항을 출발한 이 배에는 조선인 102명이 타고 있었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문정헌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함께 사는 꿈을 꾸며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이겨냈다. 그러나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돌아갈 조국을 잃은 것이다.

31일 퇴임하는 ‘이민 3세’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

1993년 한국인 최초로 하와이 주대법원장에 선임돼 17년째 사법부 수장 역할을 해온 로널드 문(70) 주대법원장. 그의 한국 이름은 문대양,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 문정헌씨의 손자다. 문 대법원장은 이달 31일, 자신의 70세 생일을 나흘 앞두고 정년퇴임한다. 미국의 주대법원장은 종신제인 연방대법원장과 달리 70세가 되면 퇴임한다. 은퇴 준비로 바쁜 문 대법원장을 만나 법조인으로서의 성공 비결과 초기 한인 이민사에 얽힌 아야기를 들어봤다.

“허허, 얼마나 공부를 잘했기에 대법원장이 됐느냐고요. 어릴 때 학교 성적은 평균(average) 정도였어요. 그냥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죠.” 그의 말과 눈빛에선 타고난 상냥함이 묻어난다. 난처한 질문을 해도 피하지 않고 정직한 답을 해주었다. 인터뷰는 호놀룰루 중심부에 위치한 주대법원 청사의 빈 법정에서 이뤄졌다. 사진촬영을 위해 법복을 입고 재판석에 앉는 파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문대양 대법원장의 조부 문정헌씨. 안겨 있는 아이가 문 대법원장이다. 1940년도 사진.

“왜놈 신발 신었다가 할아버지에게 혼쭐”
문 대법원장은 하와이 이민 3세다. 그의 조부 문정헌씨는 80년 전 뙤약볕 아래서 고된 농장일을 견뎌내고 미군기지 주변에 조그마한 양복점을 차렸다. 결혼은 고국에서 보내온 사진만 보고 신부감을 골랐다. 문 대법원장의 부친 문덕만씨는 할아버지에게 양복점을 물려받았고, 역시 하와이 초기 이민자의 딸인 매리 이(91) 여사와 결혼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전인 1940년 장남 문대양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하는 가게 2층에서 문 판사와 세 명의 동생들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가 한 번은 저를 크게 혼내셨습니다. 제가 왜놈 신발(일본식 슬리퍼)을 신었다는 게 이유였죠.”

문 대법원장은 부친과 할아버지로부터 애국심을 배웠다고 했다. 그의 부친과 할아버지를 포함한 초기 하와이 한인들은 임금의 20~30%씩을 떼어 300만 달러의 독립자금을 냈다. 그들의 하루 일당은 1달러가 채 안 됐다. 문 대법원장의 부모는 한 번 가본 적이 없는 고국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구호물품을 보내는 데 앞장섰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하와이였지만 솔선수범하는 가족의 모습은 문 대법원장이 한국계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고등학교까지도 공부에 별 취미가 없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길 좋아했다. “솔직히 저는 10대 학창시절에 문제아도 모범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훗날 법관이 되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지요.”

1958년 아버지 문덕만은 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미국 본토에 있는 대학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백인 주류사회를 한번 겪어보라는 계산이었다. 그가 대학생활을 한 아이오와는 당시 인구 99%가 백인이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도 매우 심했다. 문 대법원장은 그곳에서 소수민족이 겪는 차별과 사회적 모순을 경험한다. “비참한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던 시절이었습니다. 택시기사에게 승차 거부를 당하고 휴게실에서 화장실을 쓰려다 점원에게 쫓겨나기도 했지요. 백인 여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유색인종이라고 딱지도 맞아 봤어요.”

이런 경험이 문 대법원장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그는 아이오와 주립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인종차별을 비롯한 온갖 비합리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조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문대양은 법대를 졸업하고 1965년 고향인 하와이로 돌아왔다. 유명 법률회사들은 아시아계란 이유로 그를 채용하길 꺼렸다. 그래도 행운이 따라 하와이 연방법원장의 서기로 취직해 법률가로서 인생을 시작했다. 문대양은 1968년까지 하와이 검찰청 검사, 이후 14년간 법률회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남에 대한 배려가 성공 밑거름
그는 잘나가던 변호사를 그만두고 1982년 하와이 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지역사회에 더 큰 봉사를 하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변호사보다 판사가 더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사로서 문대양이 맡은 첫 재판은 얄궂게도 ‘계’를 깨고 도망간 한국 여인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백인 판사와 달리 문 판사는 한인사회의 계 문화를 너무도 잘 이해했기에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1990년 주대법원 판사로 승진했고, 3년 만에 하와이주 전체의 사법권을 책임지는 10년 임기의 대법원장직에 올랐다. 2003년 주사법부 인선위원회는 문대양 대법원장의 연임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지난 수십 년간 숱한 아시아계 수재들이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지만 법관으로 고위직에 올라간 케이스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문대양 대법원장에게 법조인으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대우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어느 누구든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잘 대하라고 제게 늘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해 보이셨죠.”

문 대법원장은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 선조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렇다고 자녀들에게 한국계와 결혼하라는 순혈주의를 고집하진 않는다. 조부가 아시면 불호령을 내릴 일이지만 문 대법원장의 현재 부인은 일본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의 두 아들도 각각 일본, 하와이계 배우자와 결혼해 귀여운 손자들을 낳았다. 문 대법원장은 뉴스에서 봤던 베트남 신부에 대한 학대 사례를 거론하면서 한국사회도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있어요. 한국도 언젠가는 미국과 비슷한 다인종 사회가 되겠죠. 이젠 한국 사람들도 끼리끼리 뭉칠 게 아니라 다른 인종사회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할 때라고 봅니다.”

자신의 핏줄과 문화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다른 인종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포용력으로 바꿔야 한국이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조언이다.

지난 28년의 판사 인생에 대해 그는 스스로 어떤 점수를 매길까.
“그만하면 충분하죠. 제게 법관으로서 남은 아쉬움은 없어요. 젊은 날 꿈꾸던 목표는 거의 다 이룬 셈입니다.”

문 대법원장은 좋아하는 스포츠로 권총 사격을 꼽는다. 그는 어린 시절 악당들을 물리치는 서부영화에 흠뻑 매료돼 카우보이 모자에 장난감 권총을 차고 온 동네를 활보하곤 했다. 그 꼬마가 훗날 하와이섬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은퇴 이후의 계획을 물었다. “우선 손자들을 데리고 미국 본토와 한국을 두루 여행해 볼 예정입니다. 아이들에게 조상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정말 보여주고 싶습니다.”



미국의 법원제도
연방법원과 50개 주법원으로 이원화돼 있다. 두 법원제는 서로 다른 법적 영역과 관할권을 갖는다. 연방법원은 주로 헌법 해석, 국가 간 조약과 같이 연방과 관련된 사항을 다룬다. 최고법원인 미연방대법원은 연방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모두 종신직이다. 주법원은 각 주에서 일어나는 소송을 전담하고 별도의 대법원, 순회법원 등으로 구성된다. 주대법원은 인구에 따라 주대법원장과 함께 7명 내외의 대법관을 두며 주법에 따라 정년 제한을 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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