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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동해의 슬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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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31면

1950년대 중반 일본에는 ‘진무(神武) 경기’라는 말이 유행했다. ‘진무’는 일본국 첫 번째 임금의 원호(元號)니까 진무 경기란 건국 이래 최고 호황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도쿄는 온통 건설의 현장으로 허공에는 크레인들이 활개 치고 있었다. 핵폭탄까지 두 방이나 먹으며 처참하게 파괴당한 일본을 긍휼히 여긴 하느님이 특별히 내린 축복이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한국전쟁의 엄청난 선물이었다. 일본이 미군의 병참 역을 맡은 덕택이었다.

진무 경기 시절 일본에 사는 조선인 64만6000여 명(97%는 고향이 남한)의 인간 조건은 어떠했을까? 52년 4월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독립국 지위를 회복했지만 그와 동시에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시대에 강요당했던 천황의 신민 자격조차 빼앗겨 한낱 외국인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일본 법률은 외국인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공무원의 길을 봉쇄했다. 사회보장제도의 수혜를 제한했다. 똑똑한 청년이 대학으로 들어갈 문을 잠가버렸다.

재일조선인이 인생의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 내각은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을 기획했다. 그들은 쉽게 파트너를 잡았다. 바로 평양의 조종을 받는 조선총련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반발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도주의 깃발 아래 일본적십자사가 앞장서서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끈덕지게 설득했다. 정치적 음모의 개입을 인지한 ICRC는 양심이 찔렸지만 드디어 ‘고국으로 귀환하는 자유는 어떤 경우라도 인간 각자가 갖는 빼앗을 수 없는 권리’라는 인도주의 깃발을 받아들이게 됐다.

59년 2월 평양이 ‘재일동포귀국영접위원회’를 설치했을 때는 국제적 이해관계들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일본은 ‘부담스러운 외국인’을 대량으로 밀어내야 했고, 북한은 전후 재건을 도와준 중국지원군 8만여 명의 귀국에 따른 노동력 공백을 메우면서 도덕적 우월을 과시하고 싶었다. 중국은 북한을 지지했고, 흐루쇼프의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과대한 북한에서 발언권을 강화할 도구로써 귀국 사업을 지원하고 싶었다.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해야 하는 미국은 은밀히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이 혼자서 규탄했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59년 12월 14일 일본 니카타에서 북한 청진으로 가는 거대한 여객선이 ‘귀국 동포’를 가득 싣고 기적을 울렸다. 일주일 뒤에도 같은 출항이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만경봉호가 아니었다. 소련의 크릴리온호와 토볼스크호였다. 군사적 위협을 운운한 한국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소련의 협력이었다.

그때부터 84년까지 9만3340명이 북한으로 갔다. 그중 6730명은 조선인의 가족 구성원인 일본인이었다. 70년대에 북한은 ‘반쪽바리’들을 숙청했다.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에도 보냈다. 세월이 흘러 ‘북한행 엑소더스’가 ‘탈북 엑소더스’로 바뀌었다. 탈북 대열에는 귀국 조선인과 일본인도 상당수다. 중국 방랑의 험난한 길을 거쳐 다시 일본으로 귀국한 경우도 흔하다. 인도주의 허울로 덮씌운 국제적 거래가 수많은 개인의 운명을 고통과 파탄으로 빠뜨린 것이다.

니가타와 청진을 왕래한 그 뱃길은 동해의 뱃길이다. 물론 청진에 내린 뒤에는 돌아갈 수 없는 뱃길이었지만…. 이것이 해저로 가라앉고 있는 ‘동해의 슬픔’이다.
호주 국립대 테사 모리스-스즈키 교수가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의 국제적 음모를 파헤쳐 2007년 북한행 엑소더스라는 책을 펴냈다. 그의 노작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숨겨진 시대의 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파편처럼 흩어진 인간의 고통을 복구해 인간정신과 시대정신을 창조하려는 작가의 시선과 상상력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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