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원하고 깔끔한 냉국? 조선 간장과 식초만 넣으세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1호 10면

참으로 희한하다. 왜 이렇게 김치조차 계절을 타는 걸까? 우리 김치냉장고에는 초봄에 해 넣은 봄 김장이 두어 포기 잘 모셔져 있다. 겨울의 포기김치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군내 하나 안 나고 생생한 통배추 포기김치다. 그런데도 나는 이 여름에는 계속 오이김치·열무김치 등 여름 김치만 먹고, 아니면 아예 김치 없이 냉국과 생야채만 먹는다. 겨울 느낌이 나는 포기김치가 왠지 덥게 느껴져, 특별한 일이 아니면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국도 마찬가지다. 남편이나 나나 국 없이는 못 살지만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쇠고기국 끓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양지머리 덩어리째 넣고 푹 곤 쇠고기국은 생각만 해도 덥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24>미역냉국과 얼갈이 물김치

이런 계절 감각이 단지 음식의 온도에 좌우되는 것만은 아니다. 뜨거운 민물매운탕이나 된장찌개는 얼마든지 여름의 음식이다 싶지 않은가. 그건 확실히 재료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도 여름에는 아무래도 시원한 국물과 함께 한 끼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이럴 때 내가 애용하는 국물은, 냉국과 물김치다.

냉국에 들어가는 오이와 미역, 참 시원한 재료들이다. 거기에 국물조차 시원하니 딱 좋은 여름 음식이다. 내가 냉국을 만드는 방식은 남들과 좀 다르다. 아니, 내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특정 방향으로 빨리 바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냉국을 새콤달콤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냉국에 설탕을 넣지 않고 오로지 간장과 식초만으로 맛을 낸다.

냉국 만들기야 뭐 유별난 것이 있겠는가. 미역 불려 잘게 썰고 오이를 채 써는 것까지야 다 알 터이니. 마늘은 넣지 않아도 되나 파는 넣어야 한다. 송송 썬 파를 넣거나, 아니면 양파를 얇게 채 썰어 넣어도 좋다. 여기에 시원한 국물만 부으면 냉국은 완성이다.

냉국 국물의 핵심은 간장이다. 그것도 맛있는 조선 간장이 있어야 한다. 조선 간장과 식초만으로도 냉국 국물은 매우 시원하고 훌륭하다. 물론 조선 간장이 맛있어야 한다. 맛있는 조선 간장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감칠맛을 내기 위해 멸치 육수를 만들고 설탕을 넣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설탕을 넣는 것은, 해파리냉채·마늘장아찌·오이피클·초밥·초고추장 등 새콤한 모든 음식이 달콤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성 때문인 듯하다. 혹은 좀 더 자극적인 맛을 향한 맹목적 내달림이라고나 할까.

설탕을 넣지 않고 식초와 간장으로만 간을 한 국물은 시원하고 깔끔하다. 감칠맛이 좀 더 강하기를 원하면 공장에서 만든 간장을 아주 조금 섞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취향에 따라 고추를 썰어 넣기도 하고 고춧가루를 조금 넣기도 하지만, 매운맛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나는 그조차 넣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에 깨소금을 조금 뿌린다. 시원하고 깔끔한 국물에, 미역과 오이·파 등의 향긋한 생야채 향이 적당히 어우러지는 맛이 일품이다.

냉국을 만드는 날은 물김치가 다 떨어진 날이다. 물김치가 맛있으면 구태여 냉국까지 만들 일이 없다. 여름의 물김치로 대표적인 것은 얼갈이배추와 열무를 섞어 담그는 김치다. 나는 건더기가 연한 것을 더 좋아해서 얼갈이배추만으로 담그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김치다. 왜냐하면 겨울의 포기김치는 배추 외에도 무·갓·젓갈·해물 등 온갖 양념들로 맛을 낼 수 있지만, 여름 김치들은 고춧가루조차 많이 쓰지 않고 슴슴하고 시원하게 담그는 것이라, 오로지 재료 자체의 맛으로만 승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료가 나쁘면 아무리 잘 담그려고 해도 맛있게 되질 않는다.

일반적으로 살 수 있는 얼갈이배추보다 월등하게 좋은 재료를 사려면 아무래도 재래시장에 함지박 들고 나오는 행상을 이용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재료는, 아주 연하고 어린 야들야들한 얼갈이배추다. 사실 한여름에는 땡볕에서 탄탄하게 자라 뻣뻣한 야채가 많을 수밖에 없다. 새로 씨를 뿌려 봤자 25도가 넘는 더위에서는 싹이 트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농민들은, 이런 계절에도 계속 야들야들한 배추와 열무를 출하해내니 정말 기술자들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야채는 도매시장을 거쳐 나오기 때문에, 지나치게 연한 것들은 단으로 묶어 출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아주 연한 것들은, 결국 특별히 밭에서 직접 뽑아서 함지박에 들고 나오는 행상 아주머니들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

다행히 내가 사는 불광동에는 이런 행상들이 많다. 새벽부터 밭에서 배추와 열무를 뽑아서 12시쯤이면 길거리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딱 한 뼘 정도 자란 어린 배추가 어찌나 싱싱한지, 뿌리만 잘라내면 다듬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깨끗이 씻은 배추에, 찹쌀풀 쑨 것과 소금·물·파·마늘·약간의 고춧가루를 섞은 물을 자작하게 붓는다. 설탕은 안 넣거나, 찹쌀풀의 양이 적을 경우에만 아주 조금 넣어야 한다. 싱싱한 야채로 물김치를 담글 때에는 지나치게 뒤적거리지 말아야 한다. 연한 야채가 으깨어지면 아삭거리는 맛이 떨어진다.

하루 정도 지나면 국물과 아래의 것들이 익는데, 이때 한 번 뒤집어 주는 것이 고루 익히는 방법이다. 국물이 새큼하면 바로 냉장고에 넣어 1, 2일 더 숙성시킨 후 먹기 시작한다. 얼갈이배추의 풋풋한 냄새가 갓 뽑아온 싱그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그 새큼하고 시원한 국물은 숟가락질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어쩌다 찬밥 한 덩어리 남은 날이면, 이 건더기와 고추장만 넣어 쓱쓱 비벼 먹으면 그 맛이 또한 일품이다. 시원한 열무국수나 열무냉면도 이렇게 제대로 담근 물김치가 있어야 제 맛을 낼 수 있는데, 음식점의 열무냉면은 흉내만 내다 만 것들이 너무 많다. 단언컨대 음식 성공의 절반, 아니 팔 할은 좋은 제철 재료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