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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의 ‘지도자 크기가 나라 크기다’] 망신은 짧고 권력은 길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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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김태호 총리 후보자

총리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후보자들의 법과 도덕수준이 최고 공직을 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그 정도야(?) 충분히 예상했던 것 아닙니까? 모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며 경악하는 척하지만 위장전입,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병역 기피, 직권 남용, 재산 신고 누락, 논문 중복 게재, 불법 자금 수수 등은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는 대한민국 고위 권력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일 뿐입니다.

후보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국회의원들도 뭐 그리 크게 다르겠습니까? 궁색한 답을 하느라 쩔쩔매는 후보자들도 불과 얼마 전까지 그렇게 큰소리 치던 분들입니다. 공론을 이끈다는 언론인들은 다르겠습니까? 내정자 중에는 언론에서 일한 분도 있습니다. 그 분도 전에는 엄격한 잣대로 글을 썼겠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누구 하나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수준입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이야 가슴에 손을 얹을 것도 없이 대충 생각해 봐도 공직을 맡을 자격이 없지요.

신재민 장관 후보자

후보자들은 많은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거나 자진 사퇴하지 않으면 그대로 임명될 것입니다. 어차피 요식적이고 정치적인 청문회였으니까요. 의회가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에 요식적이고, 지명 철회를 결정하는 방식은 철저히 정치적입니다. 결국 ‘망신은 짧고 권력은 길다’는 정가의 은밀한 속설(?)만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겠지요.

청문회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진 것은 대한민국이 ‘지도자’ ‘제도’ ‘철학’이 없는 껍데기 ‘민주공화국’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공화정’이 뭡니까? 권력이 왕(군주정)이나 귀족(귀족정)에게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는 것이지요. 물론 영국이나 일본처럼 형식으로는 입헌군주제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공화정을 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북한이나 중국처럼 형식은 공화국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군주정(수령)이나 귀족정(정치국)에 가까운 나라들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민주공화국이 맞나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177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이 채택된 역사적인 장소지요. 조지 워싱턴이 집무를 보던 테이블도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그 바로 앞에 헌법센터가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지요. 저는 그곳에서 두 번 놀랐습니다. 흔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로 불리는 정치 지도자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럽은 왕과 귀족이 지배하던 때지요. 아시아도 물론이지요. 그런데도 이들은 놀랍게도 이렇게 선언합니다. “권력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왕으로부터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국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공화정을 선택한 것이지요. 헌법센터 실내 정면에는 ‘We the People(우리 국민은)…’로 시작하는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헌법 전문이 걸려 있습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권력의 분산을 통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 의회·법원·백악관의 크기를 철저히 계산해 지었습니다. 헌법센터에는 3개 기관 건물 모형의 실제 비례를 볼 수 있도록 한 곳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형들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 서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의회의 권위를 위해 의사당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론 건물 크기도 제일 크지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의회의 권력을 그만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당선 후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톰 대슐을 보건부 장관으로 내정했지요. 그러나 그의 세금 탈루 의혹이 드러나자 “나의 실수입니다. 내가 망쳤습니다. 여기에 책임을 질 것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며 즉각 내정을 철회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에는 두 개의 법이 있을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국민의 법과 정치인의 법이 다를 수 없다는 뜻이지요. 두 개의 법은 두 개의 사회, 두 개의 신분을 만듭니다. 두 개의 신분이 있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닙니다. 국민과 다른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귀족’이지요. 대한민국의 법은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그 답에 따라 대한민국이 ‘공정한 사회’인지 ‘불공정한 사회’인지가 결정되겠지요.

헌법센터에서 받은 인상 깊은 장면이 또 하나 있습니다. 1층 키멜 극장에서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설명하는 내레이터는 마지막 멘트를 이렇게 맺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계속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만드느냐, 바로 우리! 국민들입니다.”

정치컨설팅 민기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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