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진의 정치Q] 전·현 대통령 비서실장의 만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81세의 김정렴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장수이자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 재무장관 8개월, 상공장관 1년을 거쳐 9년 2개월이나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26년째, 그는 서울 독립문 근처 평범한 단독주택에서 칩거하고 있다. 그는 이 집에서 70년을 살아왔다. 집은 낡았고, 응접실엔 난방이 되지 않는다. 겨울추위 속에 김씨의 노년은 회색빛이다. 수년 전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아내는 의식은 있지만 말을 못하고 위에 꽂은 튜브로 음식을 받는다.

지난해 12월 초 이 집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김우식 비서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김씨의 충남 강경상고 17년 후배다. 두 사람은 차례로 상고 동창회장을 지냈다.

응접실에 전기난로를 켜놓고 두 사람은 1시간 가량 얘기를 나누었다. 김씨는 "모시는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훌륭한 대통령이 되도록 돕는 것이 비서실장의 책임"이라며 "노 대통령은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맞는 말씀"이라고 했다.

김씨는 청와대가 너무 비대해졌다고 지적했다. 비서실 인원이 박 대통령 때는 225명이었는데 김영삼 대통령 때 400명으로 늘더니 지금은 480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비서실은 대통령과 내각 사이에서 조용히 가교 역할만 하면 되는데 기구가 너무 크면 부작용이 많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통령 산하 위원회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상관이 이렇게 많으면 부처의 실.국장들이 제대로 일을 못한다"고 말했다.

20여일 후 김 실장은 김씨를 시내 호텔 양식집으로 초대했다. 선배 비서실장의 경험담과 조언을 본격적으로 들어보려는 것이었다. 김 실장은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 보좌관도 대동했다.

두 번째 회동의 주된 주제는 경제였다. 김씨는 "김대중 대통령 때 잘못된 경기부양책으로 신용카드가 남발돼 지금 신용불량자가 넘치는데 서둘러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곤 "강성노조가 문제다. 기업의 투자의욕을 살리려면 노사화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회동 내내 김 실장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에는 길고 깊은 계곡이 있다. 먼저 역사관의 차이다. 노 대통령은 "유신헌법책으로 고시공부를 하면서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의 죽음과 노 대통령의 집권 사이엔 24년이란 세월도 있다. 시대의 주제도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바뀌었다.

김정렴씨와 김우식 실장의 만남이 계곡을 건너가는 다리가 될 수 있을까.

김진 정치전문기자

*** 바로잡습니다

◆ 1월 26일자 6면 '김진의 정치Q' 중 "박씨의 노년은 회색빛이다"라는 문장에서 박씨는 김씨(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잘못된 표기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