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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개천마저 메워져버리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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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독자 입장에서는 합격기에도 품질 차이가 뚜렷해서 어떤 것은 천신만고(千辛萬苦)의 수험생활이 무협지 못지않게 흥미진진한가 하면, 어떤 것은 “나 잘났다”로 일관해 실망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도 가끔 합격기를 구해 읽었고 ‘걸작 수기’만 모은 단행본이 따로 나와 산 적도 있다. 제목이 ‘4년간의 휴가’였던가, 지금은 국회의원인 고승덕 변호사가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행정고시·외무고시에 차례로 패스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합격기도 읽은 기억이 난다.

지인 중 여럿은 합격기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적지 않은 세월의 청춘을 바쳐 고시에 합격했다. 내년부터 ‘행정고시’라는 말이 없어지고 5급 공무원 채용에서도 민간인 전문가 비율을 점점 높인다고 한다. 자격증·학위 소지자, 특정 분야 경력자를 대상으로 필기시험 아닌 서류전형·면접으로 합격자를 뽑는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얼마 전 발표한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이다. 정부 한 부처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A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취지나 목적은 이해한다”고 전제했다. 물론 그 다음 말이 진짜 답변이다. “선발 과정에서 외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지금도 박사·변호사들을 일부 채용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커리어 관리용으로 삼는 경우를 많이 봤다. 잠시 일하다 공직 경력을 무기로 로펌이나 관련 회사로 가버리더라. 평생 몸바쳐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사람이 필요한데….” A는 “아마 행안부 방안은 부작용 때문에 몇 년 못 가 또 바뀌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측했다.

역시 행시 출신인 B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는 정두언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우려한 ‘현대판 음서(蔭敍:고려·조선시대에 권력자나 고관 자제를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던 일)제도의 부활’에 동의한다고 했다. “지금도 행시 합격자들을 보면 거의 학벌이나 배경이 빵빵하다. 그것만 봐도 이미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시대인데, 그런 추세가 앞으로는 아예 제도화되는 건 아닐까.”

행정고시로 이익을 본 사람들이니 이런 견해를 갖게 됐다 치자. 그러나 제3자 입장에서도 고위 공무원 선발 문제는 좀 더 크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회가 다변화됐다지만 고위 공무원은 여전히 막강한 파워엘리트 그룹이다.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선발 과정의 공정성과 사회적 동의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동성, 계층 이동성, 사회통합에도 중요한 변수다. 그런데도 덜컥 정책이 발표되는 것을 보면 고등고시를 1949년 국가공무원법 제정 이래 시행된 제도로만 보았지 고려 광종(958년)부터 1000년 이상 내려온 질기디 질긴 유전자는 가볍게 본 듯해 무척 걱정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일제시대와 해방공간,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100년 가까이 죽 끓듯 부글부글하던 역동성이 점차 식으면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도 곳곳에서 ‘조용히’ 치워지고 있는 국면이다.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말한 ‘업적주의(meritocracy) 사회의 그림자’가 한국에도 드리워지기 시작했다고 나는 본다. 고위 공무원을 뽑을 때 제아무리 객관적이고 정교한 면접·서류심사 기준을 세워도 초등학교 때부터 ‘스펙’ 싸움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유리할 것이 뻔하다. 고시 제도가 숱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차선책’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개천에서 용이 적게 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있는 개천마저 흙으로 메워버리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