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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칼럼』공존의 미학-4, 부모인연으로 맺어진 생명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 산 것은 반드시 죽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윤회사상이다. 따라서 윤회 사상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생물에 적용되며 그 중에서도 사람의 생명 시작을 설명하는 사상인 것이다. 즉 인간의 탄생도 윤회 사상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윤회와 태아’ 그리고 ‘부모인연과 생명’이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에 대해 짚어 보기로 하자.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의 관계 속에서 태아도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윤회(輪廻)하는 과정을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의 네 가지로 나눈 사유학설(四有學設)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영혼인 중유(中有)는 죽어서 내생에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그렇기에 공중에서 부모의 인연을 만나서 출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즉 중생이 사망 후, 그 업력에 따라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주체를 말한다. 이는 태아의 전생 업력(業力)이 출생에 영향을 미쳐서 업력이 비슷한 부모를 선택하게 된다. 전생의 영혼인 중유는 전생에 지은 업력에 의하여 출생처를 정하여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과보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전생의 업력은 인(因)이 되고 부모는 연(緣)이 되어 생유라는 결생(結生)을 한다.

생유는 인간이 태어나는 찰나를 말하는 것으로, 전생에 부모를 만나 태안에서 출생한다는 뜻이며, 또한 부모의 인연을 맺고 인간의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본유는 이 세상에 출현하여 살아있는 동안을 뜻하며, 태아가 어머니의 태안에 출생하는 찰나부터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사는 생명체를 말한다. 사유는 죽는 순간을 뜻한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낙태는 부모의 업에 의해서이루어 지고 그 악연으로 후대에 과보를 받고 그 죄악이라 한다. 그 이유는 태아는 어머니 태안에 아주 작은 물방울의 형태로 태어날 때부터 인격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오래 살지 못한 사람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사망한 사람이다. 이들은 바깥세상 구경도 하지 못한 채 강렬한 생의 희망을 포기하고 한을 품은 채 사라진 영혼들이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이미 오랜 전부터 수자공원이라 하여 각 사찰마다 수자지장이 모시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태아의 영혼을 위해 천도재하여 주는 것이 불과 몇 년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필자가 머물고 있는 구담사에서 낙태된 아이도 생명이라 하여 참회기도를 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일본 자운산에 위치한 지장사 입구에는 ‘엄마와 아가의 행복을 바라는 도량’이 있고‚ 우리나라 구담사에는 ‘엄마.아빠 참회기도 도량’이 있어 그나마 참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자(水子)란? 같은 말로는 치자(稚子)라고도 한다. 출산 직후의 아기, 또는 태아라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수(水), 즉 "미즈"라는 고어로 사산아(死産兒), 유산아(流産兒)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낙태된 아이를 수자(水子)라고 명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산아나, 유산아를 수자로 칭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영아 사망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을 잇지 못하고 출산 직후 사망한 영아들은 바다나 강물에 떠내려 보냈기 때문에 수자라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 뱃속의 양수를 따서 수자라고도 하였고, 일본에서는 (사이노 가와라 지 죠우와 산)이라 하여 즉 "화찬"(추운강가 모래밭의 지장가요)이란 구전가요의 내용상으로는 '부모나 세상을 볼 수 없는 아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가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강가에 버려진 낙태아이들 즉 어린 영혼들이나, 영아 영가들이 추운 강가의 모래밭에 모여서 “‘아버지가 그립다, 어머니가 그립다, 그리움에 울고 있는 영혼들의 슬픔이 뼈를 깎는 듯하다’며 영아 영가들은 매일같이 모래밭의 돌을 모아서 회향 탑을 쌓는데 한 층은 아버지를 위해, 또 한 층은 어머니를 위해, 또 한 층은 형제들을 위해서 회향 탑을 쌓으며 부모 형제를 한없이 기다리지만 밤이 깊어지고 어느덧 새벽이 오면 지옥의 귀신들이 찾아와서 밤새도록 쌓아올린 탑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가버린다”는 슬픈 얘기다.

이때 무너뜨린 탑을 보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영가들에게 지장보살이 나타나 “너희들은 부모로 인해 단명해서 죽은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아주 다른 세계여서 너희 부모를 만날 수 없다. 그러니 이 명부세계의 지장보살님을 부모로 생각하고 의지하여라”하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장보살이 법의(法衣)를 펼쳐 어린 영가들을 포근히 감싸 삼도천을 건너 주신다. 즉, 아이는 탑은 쌓지 못한 채 부모. 형제를 기다리는 마음에 애타는 뜻을 말한다.

그리하여 수자의 영혼은 부모와 조상의 인연상응 과보인하여 죽음에 이르면 다음 생에 태어날 때는 나쁜 인연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가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빼앗아서 잘못했다. 낳았다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가 없을 텐데 정말로 잘못했구나.” 하면서 진심으로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속에서 생명을 잃어 슬픈 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모의 ‘회합인연’이란”

세월이 지난다고 해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고 인연이 회합해 만날 때 자기 과보를 다시 받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란, 인(因)과 연(緣)을 함께 부르는 말로서 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 되는 씨앗과 같은 것이며, 연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환경과 조건으로 외·간접적 원인이다. 하나의 씨앗이 싹이 트고 성장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일단은 씨앗이 있어야 되니 이것이 인이며, 그 씨앗이 적당한 환경과 조건을 만나 제대로 성장하여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 연이다.

경전에 이르길, 남녀가 회합을 하였을 때 중음이라는 존재가 있어 그 모습을 본다고 한다. 특히 부모의 회합인연 중에서 부모가 결합하였을 때, 만약 복이 없어 얇고 하천한 집에 태어나려 할 때는 태안에 들어가는 갖가지의 몹시 어수선한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가 망령되이 우거진 숲과 대나무며 갈대 따위의 속으로 들어간다고 본다고 한다.

만약 이때, 시끄럽고 혼잡한 곳이나 음주를 하여 혼미한 상태에서 행위를 하면, 그 전도(顚倒) 즉 잘못 된 생각으로 인해 나쁜 모습만 보고 들어가 그 아이는 장차 산만하고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고 행동이 거칠어지고 술을 배우지 않아도 부모의 행위를 그대로 배우게 된다. 반대로 부모가 화목하거나 사랑이 있는 가족의 경우, 아이도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도 바르다. 그것은 부모가 행위를 할 때 서로 간에 신뢰의 사랑 속에서 조용한 가운데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복하면, 높고 귀한 집에 태어나고 스스로 고요함과 아름다움과 뜻에 맞는 음성을 들으며, 스스로 허망하게 궁전에 오름을 보는 따위의 뜻에 맞는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때 부모는 탐냄이 모두 지극하여 맨 나중에는 저마다 한 방울씩의 짙은 정혈을 내는데, 둘의 방울은 뒤섞여져서 어머니의 태 안에 머무르고 회합하여 한 덩이가 되나니, 마치 끓인 젖이 엉기어 맺혀진 때와 같다. 이처럼 장차 태어날 아이는 부모가 회합함에 있어 소유한 정기를 자신으로 보고, 보고 나서 즐거운 마음을 일으키며, 즐거운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미혹에 얽힌다. 미혹에 얽히므로 중유(中有)는 무겁게 되어 이동하지 못하게 된다.

중유란?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육체는 사라지고 정신은 남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중유는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천안(天眼)으로만 볼 수 있는 ‘정신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선업(善業)을 많이 포함한 중유는 업(業)과 부모와의 인연에 따라 만나게 된다. 즉 태어날 부모를 만날 때는 아무렇게나 우연에 의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말해, 선업에 의해 사물을 옳게 보는 힘이 있을 경우, 좋은 인연으로 좋은 부모를 찾아 태어나지만, 악업(惡業)을 많이 지어 포함한 중유는 사물을 바라보는 힘이 미약하여 사람이나 동물을 가리지 않고 아무 몸이나 찾아 태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중유는 살아있을 때의 습(習)에 의하여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며, 또다시 육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남녀 즉 부모가 될 사람이 음행하는 것을 훔쳐보게 되고 드디어 모체의 생식기속으로 들어가 수정란과 합쳐지게 된다.

따라서 남녀(앞으로 부모 될 부부)가 회합을 할 경우,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 즉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좋은 원인 제공한 것이 되므로 좋은 씨에서 크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때와 장소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이처럼 불교에서는 생명의 시작은 어머니 그 다음이 아버지 그리고 세 번째 조건으로 죽은 사람의 ‘정신적 존재’인 중유가 서로 합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명의 시작을 부부가 회합하여 수정하는 순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고 보니 문득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낙태’라는 소재를 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TV앞에 고정 시키며 그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M’ 이라는 TV연속극을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태어나는 아이에게 혼령이 자신의 부모를 찾아 끝까지 복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거에 부모가 자기를 낙태하여 다시 몸을 바꿔 태어나 복수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생명채도 생기지 않은 아이가 무슨 혼령이 있다고 하나?”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아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왜냐하면, 부부가 행위를 하는 순간 아이는 부모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즉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생명체가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어렵게 사람의 몸을 받아 잉태하였는데 부모로 인하여 낙태를 한다면 그 아이는 부모의 원망으로 원결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산부인과 의사인 <버드나 나탄슨>이 제작한 ‘침묵의 절규’라는 다큐프로를 보면, 태아는 심장을 비롯해 모든 장기를 갖춘다고 한다. 임신 12주가 되면 키가 5cm 몸무게 28g 팔 길이는 무료 5mm정도로 성장한다. 이때 태아는 손가락을 빨거나 발가락 놀음을 한다. 이미 12주면 심장을 갖추고 명색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과 의식을 갖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낙태 건수는 상대적으로 음지에서 엄청난 수로 늘어나고 있다. 더 문제는 최근 들어 낙태의 연령층이 과거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의 행해졌던 것에 반해 10대 청소년으로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낙태 현실의 심각성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전자에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단순한 호기심에 의해 벌어지는 그에 따른 행동이 얼마나 많은 경고 메세지를 주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종교차원에서라도 하루빨리 천도공양하며 참회하고 죄업을 소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근본원인인 건전한 생활 영위에도 불자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울러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우리 사회가 하루빨리 낙태를 방지하기 위해 낙태법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법의 개정은 물론 미혼모시설 증대를 정책화하고 또 소외된 그들을 위해 따뜻한 사랑으로 포옹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도움말 : 『구담사』지율스님

<본 자료는 정보제공을 위한 보도 자료입니다.>

조인스닷컴(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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