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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조현오가 가야 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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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A4 13장에 달하는 강연록은 시대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문서다. 조 서울청장은 공권력이 어떻게 유린되고 시위진압이 얼마나 어려운지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죽창을 휘두르는 시위대, 경찰 지휘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언론, 폭력 시위대의 앞줄에 서는 국회의원, 광우병·천안함 그리고 대통령 죽음까지 왜곡하는 일부 사회세력…조 청장은 ‘공격받는 제복’을 개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시위 진압 지휘관들에게 그래도 경찰이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자성(自省)과 자제력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한민국 경찰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민정서와 언론환경을 거스르면 안 된다” “정말 참기 힘들지만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너무 감정적이지만 그런 거 때문에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도 됐다”….

그는 마지막으로 경찰의 숭고한 가치를 역설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법치(法治)인데 경찰이 법치를 수호하니 경찰이 진정한 민주투사라는 명쾌한 논리였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경제발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입만 살아 있는 일부 운동가보다는 저임금에 고생한 여공들이 민주화의 공로자”라는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강연에서 보인 조 청장은 국가관이 투철하고 경찰조직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이 반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근거도 없이 전직 국가원수에게 차명계좌라는 범죄의 굴레를 씌운 것이다. 생의 마지막 나날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의 결백을 주장한다. 부인과 조카사위가 거액을 받고, 친구이자 부하인 사람이 대통령 특수활동비를 횡령했지만 대통령 자신은 몰랐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결백과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차명계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 모든 걸 뒤엎는 것이다. 조 청장은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의 죽음을 해체하는가.

노무현은 부실(不實)한 대통령이었다. 국가·헌법·북한·한미동맹·자본주의…이 모든 것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뒤틀려 국가는 분열하고 신음했다. 학생으로 치면 노 대통령은 공부를 매우 못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못했다고 근거 없이 ‘커닝을 했다’고 매도해선 안 된다. 노 대통령이 차명계좌를 가졌다면 자살의 성격, 5년 집권에 대한 평가, 그리고 국가 이미지가 모두 달라진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서 조 청장은 신중하지 못했다. 범법을 수사하고 법을 집행하는 고위 관리답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조 내정자는 “주간지나 인터넷 언론에서 본 걸 얘기한 것”이라고 했다. 노무현 사건의 수사팀은 “차명계좌가 나온 건 없었다”고 확인했다. 그래도 의혹의 바람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많은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무슨 정보가 있으니 서울 경찰청장이 그런 얘기를 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노 전 대통령과 유족이 입을 상처를 조 청장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조현오 강연록’은 시대의 허위에 대한 고발장이요, 경찰의 고뇌에 대한 소중한 증언이다. 그가 경찰청장에 내정됨으로써 많은 국민이 강연록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대한 실언으로 조 내정자는 그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는 법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곧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 그가 ‘법치 부대’를 이끌 수가 있을까.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