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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와 판도라 상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0호 30면

지난해 봄이었다. 세상 사람의 이목이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던 이인규(52) 변호사에게 쏠렸다. 그는 그때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였다. 중간중간 수사 내용이 흘러나왔다. 자고 나면 돈 받았다는 정치인·공무원 이름이 나돌았다. 그래도 세인의 관심은 여전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여부였다. 이 검사는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다. 수사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한 건 그 다음 달 12일이었다.

“수사가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심에 따라 공소권 없음 처분했습니다. 수사 도중 노 전 대통령께서 갑자기 서거하시게 된 점에 대해 매우 안타깝고 애통하게 생각합니다. 검찰은 이번 수사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음을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7월 7일 이인규 중수부장은 사표를 냈다. 그리고 변호사로 지냈다.

그가 다시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이 계기가 됐다. 이 변호사는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24~25일) 증인으로 채택됐다. 박연차 전 회장과 김 후보자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출석을 하면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와 수사 내용의 언급을 피하기 어렵다. 본인도 언론 인터뷰에서 “나가서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겠다. 거짓말은 안 하겠다” “내가 청문회에 나가면 (김태호 청문회가 아닌) 노무현 청문회가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청문회에 나가 ‘공소권 없음’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수사기록 봉인을 풀어버리면 어떨까. 고인을 욕되게 하거나 누구를 단죄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더 이상 이 문제로 소모전을 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기에 하는 말이다.

이미 정치권은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문제를 각자 입맛대로 재단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강약을 조절하며 오히려 즐기는 듯하다. 조 후보자 발언이 문제가 된 직후 보였던 당혹감은 더 이상 없다. 오히려 홍준표 최고위원은 “2~3일이면 밝혀진다”며 특검을 하자고 한다.

초기에 강공을 펼치던 민주당은 위축된 느낌이다. 검찰과 발언을 한 당사자가 차명계좌의 존재를 부인하는데 굳이 특검제를 들고나오는 것은 정치공세라는 것이다. 이번 청문회가 노무현 청문회로 바뀔 수 있다는 걱정이 깔려 있다.

검찰은 수사내용이 일부라도 공개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눈치다. 이 변호사의 청문회 출석에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수사를 지휘한 검사가 청문회에 나가는 선례가 되면 곤란하다는 게 명분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수사를 지휘하고 보고를 받는 전직 검찰총장들이 수시로 청문회장에 불려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일들은 지난해 6월 노 전 대통령의 수사기록이 공개됐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이다. 인사청문회도 지금처럼 정략적으로 흐르진 않았을 것이다.
이 변호사는 많은 아쉬움을 안고 검찰을 떠났다. 저인망식 수사로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사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는 사직서를 낼 무렵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하겠다”고 했었다. 수사 결과 발표 때는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에 관한 얘기를 했다. 조 후보자의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이 문제가 되기 전이었다. 공개 안 된 수사 내용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라는 취지였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인사 청문회의 증인으로 채택된 뒤 이 변호사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무언가 얘기할 수 있다는 투다.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에 대한 검찰의 공식 해명과 다른 뉘앙스다. 그가 증인으로 채택되긴 했지만 실제로 증인석에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검찰의 조직 특성상 내부의 반대가 심하다면 나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변호사에게는 명예회복의 기회인 동시에 역사의 짐을 털어버릴 기회다. 영원한 봉인은 없다. 청문회에는 나가야 한다. 그곳에서 진실을 얘기하고 틈만 나면 나오는 소모적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가 말한 ‘진실을 밝힐 때’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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