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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정치영화'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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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강우석(44)씨는 지금 한국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유력한 제작자이지만 '투캅스''공공의 적'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찰리 채플린만 생각하면 도저히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고 토로할 만큼 코미디 영화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강감독은 늘 "뛰어난 정치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그가 최근 한 편의 시나리오를 보고 반색했다고 한다. 내년 3월 개봉 예정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정치'판'을 풍자하는 코미디다. 여당 총재의 음모로 야당 의원이 살해되면서 여야의 원내 의석수가 같아진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여야가 보궐 선거에 총력전을 펼치는데 한 윤락녀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예상 불허의 접전이 된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완벽한 누드정치'를 펼치겠다는 그녀의 포부에 유권자들이 열띤 반응을 보인 것이다. 다소 엉뚱한, 그러나 전혀 현실성이 없지만도 않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감독이 '당장 계약하자'며 투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한국은 위압적인 정치 풍토가 오래 지배해 온 탓에 정치인을 내세우거나 그들을 비판하는 영화가 드물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대통령의 연인''앱슬루트 파워' 등으로 권력자의 내밀한 여성 관계까지 다루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그러나 이 '금단의 땅'이 열리고 있다. 최근작 '피아노치는 대통령'은 한국영화로는 유례없이 대통령이 주인공이다. 게다가 딸의 담임선생님과 사랑에 빠진다는, 파격적인 발상을 깔고 있다. 이 밖에도 충무로에는 정치인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몇 편 돌고 있다고 한다. 한국영화의 소재 확대라는 면에서 이런 현상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정치소재의 영화는 입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면 얄팍하고 상투적으로 떨어질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광복절 특사'에서 국회의원을 비꼬는 장면이 가장 거북했다는 평을 받은 것이나 '피아노치는 대통령'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설정으로 관객을 모으는 데 실패한 점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사실'정치영화'란 정치인을 다룬 영화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정치란 사회 모든 세력간의 역학(力學)관계이지 정치인들 사이의 각축이라는 좁은 틀로 제한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란 그런 역학 관계의 대리인 혹은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서울 하이퍼텍 나다와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26일까지 상영 중인 장 뤽 고다르 회고전은 정치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중국여인''만사형통' 등 고다르의 영화는 정치란 과연 무엇이며, 영화는 정치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응집체다.

'기타 치는 대통령'을 표방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당선자가 됐다. 이제 우리도 괜찮은 정치영화를 가질 때가 됐다.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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