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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문우서림'대표 김영복씨] "빛바랜 古書 속에 빛이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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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인사동은 동네 자체가 한국문화의 기호다. 화랑·고서점·골동품점·지필묵방·공예품전,그리고 전통 음식점과 찻집 등이 즐비한 인사동은 우리의 전통 문화와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나가게 하고 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원형질이 무엇인가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먼저 인사동으로 안내한다.그런 인사동을 마당발과 마당쇠로 지켜내고 있는 이가 고서점 문우서림 대표 김영복(48)씨다.

"인사동은 문화의 늪입니다.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힘듭니다. 돈도 못벌고 이름도 드날릴 수 없고 문화의 파수꾼이란 긍지도 가질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향취와 매력이 있어 빠져나가기 힘들지요. 환경적 측면에서 늪은 잘 살리면 그윽하고 안온한 생명들의 보고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황폐한 흙탕물이 되듯 인사동 또한 잘 보존된 늪이었으면 합니다."

한국학 자료 판독의 대가

인사동 조그만 빌딩 2층에 있는 10평 남짓의 문우서림은 빛바랜 고서 6천권 가량으로 둘러싸인 늪이다. 전국에서 수집돼 올라온 그 고서들은 김씨의 옛 책을 판독해 내는 혜안을 거쳐 그 가치가 매겨진다. 그런 책들은 누가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손금 들여다보듯 꿰고 있는 김씨에 의해 필요한 학자들에게 돌아가 한국학 발전의 양식이 되고 있다.

74년께 고서점의 터줏대감인 인사동 통문관 점원으로 들어온 김씨는 고서점의 산 증인인 통문관 대표 이겸노옹에게 고서 판독법을 배웠다.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책을 다루면서 어깨 너머로 보고 모르면 묻고 또 하루 한 권씩 독파하는 독서로 그 내용도 충실히 했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한 김씨는 점원생활을 하면서도 임창순·김창현씨 등 당대 최고의 한학자들로부터 계속 한학을 공부했다.

"서지학자 못잖은 안목이 있어야 고서점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활자로 찍었느냐 하는 판본은 물론 발행 연도·지질 등을 살펴야 합니다. 또 희귀본인가도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과 지금 한국학 수준과의 관계입니다. 그런 판본과 내용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김씨가 점원으로 있던 시절 한국어문교육연구회·국어국문학회·진단학회·역사학회·복식학회·민속학회 등이 통문관을 거점으로 삼아 연구와 자료를 교류했다. 자료적 가치가 있는 고서적이야말로 한국학의 기초요 방향타이기 때문이다. 이희승·남광우·이가원 선생 등 김씨는 한국학의 대가들을 책 심부름 하는 등으로 모셨다.

또 '귀천'의 시인 천상병을 비롯, 김구용·민병산 선생 등으로부터 인사동 문화의 향취를 배웠으며 시인 신경림·김지하씨, 소설가 김성동씨 등이 이 책방에서 고서적을 뒤적이며 작품활동을 펼쳤다. 소설가 최인호씨도 '상도'를 집필할 때 주인공 임상옥 문집 등을 이곳에서 구해 읽었으며 김주영씨도 역사소설을 쓸 때 고서적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상황을 철저히 그려나갔다.

"남한에서 제작된 영화 임꺽정을 보면 여럿이 모여 먹는 상이 나오는데 북한의 임꺽정을 보니 독상이더군요. 조선시대 풍속으로 보아 독상이 맞습니다. 점잖은 양반들이 하인 앞세우고 어떻게 가파른 산을 올랐는가 궁금했는데 옛 서화를 보니 날랜 하인이 험한 곳에 먼저 올라 매듭진 밧줄을 내리면 그 매듭을 잡고 밟고 올라가더군요. 자료에 의한 고증을 철저히 거쳐야만 민족문화의 원형이 제대로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재현은 금방 들통나게 마련입니다."

책·그림·글씨 워낙 좋아해

책과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다 보니 그것을 모두 취급할 수 있는 고서점에 김씨는 뛰어들었다. 통문관에서 독립할 때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아 한문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그에게 이 책 저 책 감정과 구입을 요구하는 사람이 늘어 번역에는 시간을 못내고 있다. 조선시대 초에 나온 『경국대전』 초간본을 발굴했을 때의 흥분은 잊을 수 없으며 지금도 간혹 고려시대 서적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일본만 하더라도 몇년에 한 번씩 고전을 새로 고쳐 펴내고 있는데 우리는 개작은 물론 새롭게 국역한 책들도 찾아보기 힘들어 안타깝습니다. 또 원로 한학자·한국학자 등에 대한 사회적 예우도 형편없어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게 무척 아쉽습니다. 한국학 발전과 한국문화 보존을 위해 고전번역상 제정 등 이 분야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시급합니다."

일본인들은 간다의 고서점 거리뿐 아니라 이곳 인사동에까지 와 고서적을 사간다. 미국의 코넬대학에서도 이 서점에 와 고지도 등을 구입한다. 물론 진품을 내놓을 수 없어 복제본을 판다. 이렇듯 선진국에서는 다른 나라의 옛것들도 연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는 것이다.

고전번역 국가지원 시급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책(冊)·시(詩)·서(書)·화(畵)순으로 가치를 두었습니다. 일제 때까지도 책 한 권과 그림 한 점을 맞바꾸었다는데 지금은 책 한 권 값 1만원 남짓으로 살 수 있는 그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림·이미지보다 내용·정신을 우위에 두었던 우리의 가치가 전도되었으니 지금 우리 사회가 이리 경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인사동의 기념품점에서는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들어온 제품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인사동에서만이라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우리의 것들만 내놓아야 한다는 의식 있는 '인사동 사람'들이 드물어 김씨는 외롭다. 그럼에도 서당이랄 수 있는 이문학회·민학회·서지학회 등은 물론 환경단체와 1% 나눔운동에서 김씨는 앞장서고 있다.

무엇보다 인사동의 애경사나 문화예술인들의 인사동 전시회는 발벗고 나서 도움을 주고 있다. 인사동의 '마당발'이면서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극구 사양하는 인사동의 숨은 우리 문화지킴이가 김씨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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