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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IT 관음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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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7년 파리 센 강변에서 교통사고로 숨지자 남동생 스펜서 경(卿)은 "파파라치가 죽였다"고 원망했다. 다이애나가 이집트 출신 바람둥이 도디와 같이 저녁을 먹고 사라지려 하자 파파라치들이 추적했다. 운전사가 파파라치를 떨쳐내기 위해 과속하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는 주장이다. 부검 결과 운전사는 마약과 술에 취해 있었다. 물론 파파라치는 무죄.

당시 다이애나를 추모하던 영국에선 파파라치에 대한 비난과 함께 관음증(觀淫症)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관음증은 성적인 장면을 훔쳐봄으로써 대리만족하는 도착증. 넓게는 남의 사생활 들여다보길 즐기는 심리를 일컫는다.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몰아간 범인은 파파라치가 아니라 몰래 찍은 사생활 사진을 보고 즐긴 자신들이었다는 자책감이다. 대중지들은 "왕자들이 성년이 되기까지 파파라치 사진을 싣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최근 물의를 빚은 해리(20) 왕자의 나치 복장 사진은 아마추어 파파라치의 작품이다. 가장무도회에 동참했던 누군가 카메라폰으로 찍어 대중지에 팔았다. 사진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신문이 채 나오기도 전에 이스라엘 정부가 항의하고 왕실이 사과 성명을 냈다. 카메라폰과 인터넷이 결합한 IT 관음증 시대다. 누구나 파파라치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미디어를 소유할 수 있는 세상에 관음증이 난무하게 생겼다.

정신분석학에서 관음증은 본능이다. 성격발달 단계 중 항문기(1~3세) 시절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의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도착증의 한 원인이 된다. 성기기(3~5세) 시절 거세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숨고 감추는 과정에서 훔쳐보기 욕구가 자리 잡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 같은 도착증세가 IT 시대를 맞아 나 홀로 사이버 세상에 빠지는 인터넷 중독으로 더 심각하고 불건전해진다고 한다. 영국의 선데이 텔레그래프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게임기에 붙어사는 일본에서 특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연예인 X파일이 인터넷에 올라 순식간에 국민적 화제가 되는 우리나라도 일본 못지않은 IT 강국이다. 인터넷 세상은 강압과 규제가 불가능하다. 그저 자제와 자율만이 최상의 윤리이자 가능한 처방일 것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