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안부를 물을때 뭐라 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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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가끔 친구들에게 안부를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매일 똑같지 뭐"혹은 "사는 게 다 그렇지"이다. 대사가 지나치게 일관돼 있어 그들이 서로 공모한 건 아닐까, 다만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러면 몇 개 의문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매일이 같다 한들, 오늘 아침 찬 바람이 어제의 후덥지근한 그것과 같은 바람일까? 아침 지하철에서 보는 사람들조차 평생 만난 적 없는 얼굴들의 스펙터클 아닌가? 그리고 대관절 무슨 자격으로 사는 게 다 그렇다고 시들하게 선언할 수 있는 걸까? 삶이란 고작 그런 상심, 그런 탄식밖에 주지 않는 걸까? 문명은 그토록 오래 전의 일이거늘 고작 몇십년 산 목숨으로 어찌 그리 교만하게 낙담할 수 있는 걸까?

하긴, 어렸을 때만 봐도 성적이 좋을 게 뻔한 애들조차 시험을 망쳤다고 묵은 엿색깔 얼굴로 엄살을 떨었었다. 내 손에 쥔 패를 남루하게 드러내려는 건 그렇게라도 상대를 위로하려는 서툰 심사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성품 자체에 은닉된 생득적 연민 때문에? 또는 가학적 피학적 쾌감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 혹은 본질적으로 기분 좋은 상태란 진정 없는 걸까? 정말 사람은 한없이 좋아도 불충분한 걸까?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안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던 연극 속의 여자처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별일 없고?""아니, 매일 매일이 별일이지" "넌 좋아보인다?" "그럼 난 언제나 행복해." 그는 나의 상투적인 대답을 역겨워했다. "넌 뭐가 그렇게 매일 행복하다는 거지?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다른 친구도 야유했다. "넌 늘 고민없다고 말하지만 얼굴엔 고민만 많아보이더라."

나는 풀잎 하나에도 우주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거나, 장애를 오히려 신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고결한 현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에 관한 나의 토로란 사실은 내 자신을 속이는 관조적 수사에 불과하다. 때로 내 자신이 미친 듯 두터운 분칠을 한 가부끼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고 한들 나에게 안부를 묻는 사람들을 그토록 나의 누추한 하소연으로 시시하게 감염시키고 싶진 않다. 친절하지만 힘없는 거짓말로라도 그의 하루를 선선하게 부축하고 싶을 뿐이다.

아마 우리가 꿈꾸는 것들은 너무나 창대한 것들이겠지. 그러니 웬만한 것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거겠지. 아니, 어쩌면 그들이 그리는 피안의 내부는 유리조각으로 혈관을 그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꿈의 질량을 줄임으로써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다는 내 말이 그토록 공허하게 들리는 거겠지.

이충걸·『GQ코리아』편집장

norway@doo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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